가장 오래된 악기 중 하나.
소리와 수
음악은 동굴벽화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됐습니다. 그리스에서 음악은 ‘움직이는 수’를 다루는 수학의 한 분과였고, 듣는 사람의 성품을 바꾸는 교육과 정치의 문제였습니다.
일부라도 해독 가능한 가장 오래된 악보.
현 길이의 정수비가 화음을 만든다.
피타고라스는 현의 길이를 절반으로 하면 옥타브(2:1), 2/3로 하면 5도(3:2), 3/4로 하면 4도(4:3) 높은 소리가 나고 이 소리들이 잘 어울린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행성들도 조화로운 소리를 낸다는 ‘천구의 음악’으로 이어졌고, 음악은 산술, 기하학, 천문학과 함께 4과(quadrivium)가 되어 중세 대학까지 이어집니다.
용기를 키우는 선법만 남겨라.
그리스인들은 도리아, 프리지아, 리디아 같은 선법이 각각 다른 성격을 가지며 듣는 사람의 성품을 바꾼다고 믿었습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나약하게 만드는 선법은 금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아리스톡세노스는 음정은 수의 비율이 아니라 귀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수학 대 지각의 대립은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성가와 기보의 싹
중세 음악의 중심은 교회였습니다. 반주 없이 하나의 선율로 부르는 성가를 모두 외워서 전했고, 선율의 오르내림을 적는 기호가 조금씩 생겨납니다.
완전한 형태로 남은 가장 오래된 노래.
그리스의 한 묘비에 가사와 음표가 함께 새겨져 있어, 오늘날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를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빛나라”로 시작합니다.
실제로 들리는 소리는 가장 낮은 단계의 음악.
보에티우스는 음악을 우주의 조화, 인간 영혼과 몸의 조화, 실제로 연주되는 소리의 세 단계로 나눴습니다. 이 책이 중세 1,000년 동안 음악 이론의 교과서였습니다.
라틴어로 부르는 하나의 선율.
교회 선법을 따르는 단선율 성가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이름이 붙었습니다(실제로 그가 만든 것은 아닙니다). 수백 곡의 성가를 모두 외워서 전했습니다.
선율의 모양을 적고, 두 번째 선율을 겹치다.
가사 위에 선율의 오르내림을 표시하는 부호(네우마)가 생겼지만 정확한 음높이는 알 수 없었습니다. 같은 무렵 성가 선율에 4도나 5도 아래로 평행하게 따라가는 선율을 겹쳐 부르는 오르가눔이 나타납니다. 다성음악의 시작입니다.
악보와 다성음악
귀도 다레초의 발명으로 음악을 정확히 적을 수 있게 되자 복잡한 음악을 작곡할 수 있게 됩니다. 고딕 성당이 하늘로 솟던 시기, 같은 건물 안에서 음악도 수직으로 쌓입니다.
도레미의 기원.
이탈리아의 수도사 귀도는 가로줄을 그어 음높이를 정확히 표시하는 방법을 만들었습니다. 오선보의 직접적인 조상입니다. 한 찬송가의 각 구절 첫 음절을 따서 ut, re, mi, fa, sol, la라는 계이름도 붙였습니다(ut는 훗날 do로 바뀝니다). 성가 학습 기간을 10년에서 몇 달로 줄였다고 합니다. 음악사에서 문자의 발명만큼 중요한 사건입니다.
궁정 연애를 노래한 음유시인.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여러 성부.
한 사람이 쓴 미사곡 전체.
‘새로운 기법’이라는 뜻의 아르스 노바 시대에 리듬이 훨씬 복잡해졌습니다. 기욤 드 마쇼는 미사곡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작곡한 최초의 인물로 꼽힙니다. ‘작곡가’라는 개념이 뚜렷해집니다.
르네상스, 3도의 아름다움
중세에는 옥타브, 5도, 4도만 완전한 협화음이었습니다. 르네상스에 3도와 6도가 받아들여지며 서양 화성의 기본이 생기고, 여러 독립적인 선율이 조화를 이루는 대위법이 황금기를 맞습니다. 악보 인쇄가 음악을 국경 너머로 퍼뜨립니다.
3도와 6도의 달콤한 소리.
던스터블 등 영국 작곡가들이 3도와 6도를 풍부하게 쓴 부드러운 소리를 유럽 대륙에 퍼뜨렸습니다. 이것이 이후 서양 화성의 기본이 됩니다.
선율을 성부마다 차례로 따라 부르다.
뒤파이에 이어 조스캥 데 프레는 한 성부가 시작한 선율을 다른 성부들이 차례로 따라 부르는 모방 대위법을 완성했습니다. 르네상스 회화의 균형 잡힌 구도와 비슷한 이상입니다.
베네치아의 페트루치.
회중 전체가 함께 부르는 찬송가.
가사가 들리는 다성음악.
트렌트 공의회는 복잡한 다성음악 때문에 가사가 안 들린다는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팔레스트리나가 가사가 또렷이 들리는 아름다운 미사곡으로 교회 다성음악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전설이지만, 그의 음악은 수백 년 동안 대위법 교육의 모범이 됐습니다.
무리수가 음악을 구하다.
피타고라스 비율로 5도를 12번 쌓으면 7옥타브 위와 정확히 맞지 않고 약간 어긋납니다(피타고라스 콤마). 그래서 순수한 비율로 조율하면 어떤 조는 쓸 수 없었습니다. 옥타브를 2의 12제곱근이라는 같은 비율 12개로 나누면 모든 조를 쓸 수 있습니다. 명나라의 주재육이 이를 처음 정확히 계산했고, 유럽에서는 스테빈이 비슷한 시기에 계산했습니다.
가사의 감정을 음악으로 그리다.
세속 시에 붙인 다성 가곡 마드리갈은 탄식, 웃음, 죽음 같은 가사의 감정을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제수알도는 놀라울 만큼 파격적인 반음계 화성을 썼습니다. 그는 아내와 그 정부를 살해한 귀족으로도 유명합니다.
바로크, 오페라와 조성
오페라가 태어나고, 여러 교회 선법이 장조와 단조로 정리되며, 이후 300년 동안 서양 음악의 문법이 될 조성이 확립됩니다. 노래 반주가 아닌 악기만을 위한 음악이 독립합니다.
그리스 비극을 되살리려다 태어난 오페라.
피렌체의 학자 모임(카메라타)은 그리스 비극이 원래 노래로 불렸을 거라 생각하고 이를 되살리려 했습니다. 다성음악은 가사가 안 들리니, 하나의 선율이 가사를 전하고 화음이 받쳐주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최초의 위대한 오페라로 꼽힙니다.
셈여림을 표현하는 건반, 그리고 바이올린의 황금기.
크리스토포리는 건반을 누르는 세기에 따라 소리의 크기가 달라지는 피아노를 발명했습니다. 같은 시기 스트라디바리는 지금도 최고로 꼽히는 바이올린들을 만들었습니다.
화음의 원리, 그리고 24개 조 전부.
라모는 화음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했습니다. 같은 해 바흐는 24개 장단조 전부로 곡을 쓴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으로 모든 조를 쓸 수 있는 조율의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엄밀히는 오늘날의 완전한 평균율이 아니라 ‘잘 조율된’ 음률이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독주와 오케스트라가 경쟁하다.
영국에서 성공한 독일 작곡가.
바로크 대위법의 정점.
교회 음악 감독으로 매주 칸타타를 썼던 바흐는 말년에 대위법의 집대성인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살아 있을 때는 오히려 구식 작곡가로 여겨졌고 사후 거의 잊혔다가, 1829년 멘델스존이 『마태수난곡』을 다시 공연하면서 부활합니다.
고전주의, 소나타의 시대
계몽주의 시대에 바로크의 복잡한 대위법 대신 명료하고 균형 잡힌 선율이 선호됩니다. 대조되는 두 주제를 제시하고 전개하고 재현하는 소나타 형식이 교향곡과 4중주의 설계도가 됩니다. 귀족 궁정 옆에서 시민을 위한 공개 음악회가 늘어납니다.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은 헝가리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궁정 음악가로 30년 가까이 일하며 교향곡 104곡을 쓰고 현악 4중주를 확립했습니다. 말년에는 런던의 공개 음악회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귀족을 골탕 먹이는 하인들.
다섯 살에 작곡을 시작한 신동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밑을 떠나 빈에서 후원자 없이 살려고 했습니다. 오페라, 교향곡, 협주곡 모든 장르에서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남기고 1791년 서른다섯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폴레옹에게 바치려다 찢은 헌정 페이지.
청력을 잃어 가던 베토벤은 1802년 동생들에게 쓴 유서에서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예술을 위해 살기로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교향곡 3번 「영웅」은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다 그가 황제로 즉위하자 분노해 헌정 페이지를 찢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귀족의 하인이 아니라 독립된 예술가로서의 작곡가라는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시와 피아노가 함께 그리는 가곡.
슈베르트는 시에 곡을 붙인 독일 가곡을 600곡 넘게 썼습니다. 피아노가 단순한 반주가 아니라 시의 정경과 감정을 함께 그립니다. 31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낭만주의, 감정과 스타
이성보다 감정과 개인, 자연, 민족을 중시하는 시대입니다. 시민 계층이 공연장과 집 안 피아노의 주된 소비자가 되고, 연주 실력을 뽐내는 스타 연주자가 등장합니다.
귀가 먼 작곡가의 합창 교향곡.
100년 만에 다시 연주된 『마태수난곡』.
스무 살의 멘델스존이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다시 공연하면서 잊혀 있던 바흐가 부활했습니다. 과거의 위대한 작품을 연주하는 ‘고전 레퍼토리’라는 개념이 이때부터 자리 잡습니다.
음악으로 그린 사랑과 절망의 이야기.
한 예술가가 사랑에 빠지고 절망하는 줄거리를 음악으로 그린 이 교향곡은, 음악 바깥의 이야기를 담는 표제 음악의 대표작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극적으로 넓혔습니다.
최초의 슈퍼스타 피아니스트, 그리고 피아노의 시인.
리스트는 혼자 무대에 서는 피아노 독주회를 열고 관객을 열광시킨 최초의 슈퍼스타였고, 이야기와 그림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교향시를 만들었습니다. 쇼팽은 거의 피아노 곡만 쓰며 피아노를 노래하는 악기로 만들고, 폴란드 민속 춤곡을 예술 음악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성기.
베르디는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 등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이끌었고, 그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뒤를 이은 푸치니는 『라 보엠』, 『나비부인』을 남깁니다.
음색은 배음의 비율이다.
물리학자 헬름홀츠는 하나의 음이 기본음과 그 정수배 진동수의 배음들이 섞인 것이고, 배음의 구성 비율이 악기마다 다른 음색을 만든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푸리에 급수가 그 분석 도구입니다. 피타고라스의 정수비가 푸리에 해석으로 다시 이어졌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화음.
첫 화음, 이른바 트리스탄 화음은 해결되지 않고 계속 다음 긴장으로 미끄러지며 끝없는 갈망을 표현합니다. 조성의 기반을 흔들어 20세기 무조 음악의 출발점으로 꼽힙니다.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에 심취했고, 반유대주의 글과 훗날 히틀러의 숭배로 지금도 논란이 되는 인물입니다.
국민악파와 녹음의 발명
독일 음악 중심에서 벗어나 각 나라의 민요와 역사를 담는 국민악파가 등장하고, 음악계는 브람스와 바그너 진영으로 갈립니다. 그리고 에디슨의 축음기가 귀도의 악보 이후 가장 큰 매체 혁명을 시작합니다.
러시아 5인조와 국민악파.
무소륵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러시아 ‘5인조’는 자국의 민요와 역사를 음악에 담았습니다. 체코의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 노르웨이의 그리그도 같은 흐름에 있습니다.
15시간의 악극, 그리고 순수 기악.
바그너는 자신의 오페라만을 위한 바이로이트 극장을 짓고 4부작 『니벨룽의 반지』를 초연했습니다. 인물과 사상마다 붙는 짧은 선율(라이트모티프)은 지금 영화 음악의 테마 기법이 됩니다. 같은 해 브람스는 첫 교향곡을 내놓으며 고전 형식과 음악 그 자체의 의미를 지키는 반대편 진영을 대표했습니다.
연주 현장 없이 음악을 저장하다.
에디슨이 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축음기를 발명했습니다. 처음으로 음악을 연주 현장 없이 저장하고 반복해서 들을 수 있게 됐습니다. 훗날 재즈와 대중음악처럼 악보로 적기 어려운 음악이 퍼지는 바탕이 됩니다.
숭배에서 가장 신랄한 비판으로.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세계의 본질인 의지를 직접 표현한다며 예술 중 최고로 쳤습니다. 젊은 니체는 바그너의 열렬한 숭배자였다가 『바그너의 경우』에서 그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며 결별했습니다.
미국에서 쓴 교향곡.
체코의 드보르자크는 뉴욕 음악원 원장으로 머물며 이 교향곡을 썼고, 미국 흑인 영가와 원주민 음악에 미국 음악의 미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해 차이콥스키가 마지막 교향곡 「비창」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믈란에서 온 몽환적인 소리.
드뷔시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인도네시아 가믈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장단조의 긴장과 해결 대신 온음음계와 5음음계로 모호하고 몽환적인 음향을 만들었습니다. 미술의 인상주의처럼 순간의 분위기와 색채를 그렸다고 해서 음악의 인상주의라 불립니다.
엇박의 피아노, 래그타임.
흑인 작곡가 스콧 조플린의 래그타임은 행진곡 형식에 엇박의 리듬을 입혔습니다. 악보가 100만 부 넘게 팔렸다고 전해지며, 재즈로 가는 징검다리가 됩니다.
조성의 해체와 재즈
피카소가 원근법을, 아인슈타인이 절대 시공간을 무너뜨린 시기에 음악에서도 300년 된 조성이 무너집니다. 미국에서는 블루스와 재즈가 태어나고, 녹음과 라디오가 음악을 대중 산업으로 만듭니다.
12마디, 세 개의 화음, 그리고 블루 노트.
미시시피 델타의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온 리듬과 선창-후창, 노동요, 영가를 바탕으로 만든 음악입니다. 세 화음으로 도는 12마디 형식, 3음과 7음을 살짝 낮게 짚는 블루 노트, 가난과 이별을 1인칭으로 고백하는 가사는 이후 록과 힙합 전체의 DNA가 됩니다. W.C. 핸디가 1903년 기차역에서 블루스를 듣고 이를 악보로 펴내기 시작했습니다.
녹음기를 들고 시골로.
바르토크는 헝가리와 동유럽 시골을 다니며 녹음기로 민요를 수천 곡 채집하고, 그 리듬과 선법을 현대 음악에 녹였습니다. 민족음악학의 선구자입니다.
조성을 완전히 버리다.
쇤베르크는 으뜸음을 중심으로 한 조성을 완전히 버린 음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1907)이 원근법을 깬 것과 거의 같은 해입니다.
초연 객석의 야유와 고성.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 『봄의 제전』의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리듬과 불협화음에 파리 초연 객석은 야유와 고성으로 뒤집혔습니다. 쇤베르크가 화성을 해체했다면 스트라빈스키는 리듬을 해체했습니다.
뉴올리언스에서 온 새로운 음악.
뉴올리언스에서 블루스, 래그타임, 브라스 밴드가 유럽 화성과 섞이며 재즈가 탄생했고, 1917년 첫 재즈 음반이 나왔습니다. 즉흥 연주와 엇박의 리듬감(스윙)이 핵심입니다. 같은 무렵 수백만 명의 남부 흑인이 북부 공업 도시로 이주하는 대이주가 시작됩니다.
음악이 집 안으로 흘러들다.
12개 음을 평등하게.
조성을 버리자 음악을 조직할 원리가 사라지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쇤베르크는 12개 음을 모두 한 번씩 쓴 음렬과 그 변형으로 곡 전체를 구성하는 12음 기법을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수학적 체계입니다. 제자 베르크, 베베른과 함께 ‘신 빈악파’로 불립니다.
재즈와 클래식의 만남.
즉흥 독주가 예술이 되다.
빅밴드가 대중음악의 주류로.
사거리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 블루스맨.
로버트 존슨은 단 29곡을 녹음하고 1938년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갑자기 기타 실력이 늘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전설이 붙었습니다. 훗날 에릭 클랩턴,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이 그의 곡을 숭배하듯 다시 부릅니다. 27세에 요절한 뮤지션들을 부르는 ‘27 클럽’의 첫 멤버로 꼽힙니다.
춤추는 음악에서 듣는 음악으로.
로큰롤, 그리고 침묵
전후 호황 속에 10대라는 새로운 소비층이 생기고, 흑인의 블루스와 백인의 컨트리가 만나 로큰롤이 태어납니다. 비틀즈가 대중음악을 예술로 끌어올리는 한편, 현대 음악은 침묵과 우연, 전자음까지 음악으로 받아들입니다.
한 면에 20분, 그리고 녹음된 소리로 작곡하다.
33⅓회전 LP 레코드가 나와 긴 곡과 앨범을 담을 수 있게 됐습니다. 같은 해 프랑스의 피에르 셰페르는 기차 소리 같은 녹음된 소리를 편집해 작품을 만드는 구체음악을 선보였습니다. 녹음 매체 자체를 악기로 쓰는 생각의 시작입니다.
도시 클럽의 시끄러운 소리.
북부로 이주한 흑인들은 시끄러운 도시 클럽에서 소리를 키우려고 기타에 앰프를 연결했고, 머디 워터스의 시카고 일렉트릭 블루스가 탄생했습니다. 같은 해 펜더 텔레캐스터를 시작으로 깁슨 레스폴(1952), 스트라토캐스터(1954) 같은 솔리드바디 전기기타가 나오면서 록의 악기가 준비됐습니다.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곡.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동안, 공연장의 기침 소리와 바깥 소음이 음악이 됩니다. 뒤샹의 「샘」처럼 무엇이 음악인가를 묻는 작품입니다. 2년 뒤 크세나키스는 확률론과 통계역학을 작곡에 직접 적용한 「메타스타시스」를 발표합니다.
흑인처럼 노래하는 백인 청년.
멤피스의 가난한 백인 청년 엘비스가 선 레코드에서 블루스 곡을 녹음하며 데뷔했고, 1956년 전국 스타가 됐습니다. 흑인 음악을 백인 스타가 불러 훨씬 큰돈을 버는 구조는 이후 계속 반복되는 문화 전유 논쟁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록 기타의 원형.
척 베리는 블루스 기타를 빠르고 날카로운 리프로 바꾸고 10대의 자동차, 학교, 연애를 노래했습니다. 리틀 리처드의 비명 같은 창법, 보 디들리의 독특한 비트와 함께 로큰롤을 만든 흑인 개척자들입니다. 비틀즈와 롤링 스톤스 모두 그의 곡으로 시작했습니다.
한 해에 일어난 세 가지 일.
기타 두 대, 베이스, 드럼의 밴드 편성과 직접 곡을 쓰는 싱어송라이터 모델을 만든 버디 홀리가 비행기 사고로 스물두 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해 디트로이트에서 흑인 사장이 세운 모타운 레코드가 문을 열었고, 마일스 데이비스는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재즈 앨범 『Kind of Blue』를 녹음했습니다.
7,300만 명이 본 비틀즈.
미국 흑인 음악 레코드를 듣고 독학한 영국 청년들이 그 음악을 다시 미국에 돌려줬습니다. 비틀즈의 에드 설리번 쇼 출연을 약 7,300만 명이 시청했고, 영국 밴드들이 미국 차트를 휩쓸었습니다. 같은 해 킹크스는 앰프를 찢어 만든 찌그러진 소리(디스토션)와 파워 코드를 썼고, 모그는 신시사이저를 만들었습니다.
포크의 배신자, 가사의 혁명가.
민권운동과 함께 부활한 포크의 기수 밥 딜런은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전기기타를 들고 나와 야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록과 포크가 합쳐졌고, 대중가요 가사가 시와 문학의 수준에 올랐습니다. 2016년 대중음악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습니다. 같은 해 스티브 라이히는 짧은 패턴을 반복하며 조금씩 어긋나게 하는 미니멀리즘을 선보였습니다.
스튜디오가 악기가 되다, 그리고 첫 박의 그루브.
1966년 공연을 그만둔 비틀즈는 테이프를 거꾸로 돌리고, 시타르와 현악 4중주를 넣고, 녹음을 여러 겹 쌓으며 스튜디오 자체를 작곡의 도구로 썼습니다. 비치 보이스의 『Pet Sounds』와 경쟁하며 앨범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같은 해 제임스 브라운은 선율보다 마디의 첫 박을 강조하는 펑크(funk)를 만들었고, 그의 드럼 구간은 훗날 힙합에서 가장 많이 샘플링된 소리가 됩니다.
평화와 사랑의 정점, 그리고 균열.
40만 명 넘게 모인 우드스톡에서 지미 헨드릭스는 미국 국가를 폭격 소리처럼 연주했습니다. 그는 앰프의 피드백과 디스토션을 표현의 도구로 써서 일렉트릭 기타를 새로 정의했습니다. 몇 달 뒤 롤링 스톤스의 알타몬트 공연에서는 관객 살해 사건이 일어나 히피의 꿈이 끝났다는 상징이 됐습니다. 이어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이 모두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납니다.
록의 분화와 힙합의 탄생
록은 하드록, 헤비메탈, 프로그레시브, 글램, 펑크로 갈라집니다. 뉴욕 브롱크스에서는 악기 없이 레코드와 턴테이블만으로 힙합이 태어나고, 드럼머신과 샘플러가 새로운 악기가 됩니다. MTV가 음악을 보는 것으로 바꿉니다.
공장 지대에서 태어난 헤비메탈.
영국 버밍엄 노동자 계급 출신의 블랙 사바스가 어둡고 무겁고 느린 사운드로 헤비메탈의 원점이 됐습니다. 기타리스트 토니 아이오미는 공장 사고로 손가락 끝이 잘렸는데, 아픈 손으로 치려고 줄을 느슨하게 낮춘 것이 메탈 특유의 무거운 소리가 됐습니다. 레드 제플린은 블루스를 거대한 음량과 무게로 증폭해 하드록의 표준을 만들었습니다.
브롱크스의 생일파티.
8월 11일, 자메이카 이민자 출신 DJ 쿨 허크는 사람들이 펑크와 소울 곡에서 드럼만 나오는 간주(브레이크)에 가장 열광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같은 레코드 두 장으로 그 부분을 무한히 이어 틀었습니다. 가난과 방화로 불타던 브롱크스, 악기 살 돈도 없던 곳에서 힙합이 태어났습니다. 같은 해 핑크 플로이드의 콘셉트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에 900주 넘게 머무릅니다.
6분 안의 발라드, 오페라, 하드록.
라디오에서 틀기엔 너무 길다는 말을 들었던 퀸의 곡은 영국 차트 1위를 9주 동안 지켰습니다. 클래식의 영향을 받은 긴 곡과 복잡한 구성의 프로그레시브 록, 데이비드 보위의 연극적인 글램 록이 1970년대 록의 한쪽 극단이었습니다.
세 코드만 알면 누구나 밴드를 할 수 있다.
너무 길고, 비싸고, 기교적이고, 부자가 된 록에 대한 반란입니다. 뉴욕 CBGB의 라몬즈가 2분짜리 곡을 몰아쳤고, 영국에서는 섹스 피스톨즈가 여왕 즉위 25주년에 맞춰 조롱하는 곡을 내 방송 금지를 당했습니다. 펑크는 몇 년 만에 꺼졌지만 이후 거의 모든 비주류 록의 조상이 됩니다.
최초의 힙합 히트곡.
아프리카 밤바타는 힙합을 디제잉, 랩, 브레이크댄스, 그래피티의 네 요소로 정의하며 갱단 간 폭력을 음악과 춤 경쟁으로 돌리려 했고, 그랜드마스터 플래시는 턴테이블 기술을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슈거힐 갱의 이 곡이 힙합을 처음 레코드로 퍼뜨렸습니다.
실패한 드럼머신의 묵직한 킥.
롤랜드의 드럼머신 TR-808은 진짜 드럼 같지 않다는 이유로 상업적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 묵직한 저음 킥 드럼이 힙합과 전자음악의 상징이 되어 지금의 트랩까지 이어집니다.
음악을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MTV가 개국하면서 외모와 영상미가 중요해졌습니다. 이듬해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는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꼽히며, 백인 록 위주였던 MTV에서 흑인 아티스트의 벽을 깼습니다.
파티 음악에서 사회 고발로, 그리고 디지털로.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의 이 곡은 게토의 가난과 폭력을 직접 고발하며 힙합을 사회적 발언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같은 해 CD가 나와 음악이 디지털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록과 힙합이 벽을 부수고 만나다.
런 디엠씨가 에어로스미스와 리메이크한 이 곡의 뮤직비디오에서 두 그룹이 벽을 부수고 만나는 장면은 힙합이 백인 청소년 시장으로 들어간 상징이 됐습니다. 같은 해 메탈리카는 펑크의 속도와 메탈의 무게를 합친 스래시 메탈의 대표작을 냈습니다. 이듬해에는 선정적 가사 논란 끝에 음반에 ‘보호자 주의’ 스티커가 붙기 시작합니다.
녹음된 소리를 잘라 쌓아 곡을 만들다.
아카이 MPC 같은 샘플러로 기존 레코드의 일부를 잘라 반복하고 쌓아 새 곡을 만들게 됐습니다. 퍼블릭 에너미는 수십 개의 샘플을 겹친 소음의 벽 위에 정치적 메시지를 실었고, 라킴은 랩을 문학적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LA의 N.W.A는 『Straight Outta Compton』에서 경찰 폭력과 거리의 현실을 날것으로 그려 FBI의 경고 편지를 받았습니다.
얼터너티브와 힙합의 주류화
그런지가 하룻밤 사이에 글램 메탈을 밀어내고, 힙합은 동서부 갈등의 비극을 지나 주류의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세기말에는 파일 공유가 음반 산업을 뒤흔들기 시작합니다.
플란넬 셔츠의 반란.
펑크의 날것 같은 에너지, 메탈의 무게, 비틀즈 같은 선율이 섞인 너바나의 앨범이 이듬해 1월 마이클 잭슨을 빌보드 1위에서 끌어내렸습니다. 화려한 글램 메탈은 하룻밤 사이에 촌스러운 것이 됐습니다. 같은 해 허락 없는 샘플 사용이 소송에서 지면서, 샘플을 수십 개씩 쓰던 힙합 제작 방식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느긋한 G-펑크.
N.W.A 출신 닥터 드레는 펑크 샘플과 신시사이저를 쓴 G-펑크 사운드를 만들고 스눕 독을 데뷔시켰습니다. 같은 해 경찰 폭행 사건의 무죄 판결로 LA 폭동이 일어나자 N.W.A의 음악이 예언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동부 힙합의 정점, 그리고 또 하나의 27 클럽.
나스의 『Illmatic』과 우탱 클랜이 뉴욕 힙합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같은 해 원치 않은 명성에 괴로워하던 커트 코베인이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린 데이의 『Dookie』는 팝펑크를 주류로 끌어올렸습니다.
오아시스 대 블러.
1960년대 영국 밴드들을 계승한 브릿팝의 두 밴드가 같은 날 싱글을 내고 판매량을 겨룬 일은 국가적 뉴스가 됐습니다. 싱글은 블러가, 앨범 판매는 오아시스가 압도했습니다.
동서부 갈등의 비극.
서부의 투팍과 동부의 노토리어스 B.I.G.를 중심으로 한 갈등은 1996년 투팍, 1997년 비기가 각각 총격으로 숨지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두 사건 모두 수십 년 동안 미해결로 남았습니다.
기술 사회의 소외를 노래하다.
라디오헤드는 기술 사회의 불안과 소외를 그린 앨범으로 1990년대 록의 정점에 섰습니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은 랩과 헤비 기타에 급진적인 정치 메시지를 실어, 랩과 메탈을 섞은 뉴메탈의 길을 열었습니다.
무료 파일 공유, 그리고 그래미 올해의 앨범.
대학생 숀 패닝의 냅스터로 MP3 파일 공유가 퍼지면서 음반 판매가 급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로린 힐의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이 힙합 계열 최초로 그래미 올해의 앨범을 받았고, 닥터 드레가 프로듀싱한 에미넴이 데뷔해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래퍼가 됩니다.
인터넷이 판을 흔들다
앨범 대신 곡 단위로 음악을 사기 시작하고, 마이스페이스와 유튜브가 밴드와 래퍼를 띄웁니다. 갱스터 랩은 저물고, 더 다양하고 내성적인 힙합이 주도권을 잡습니다.
기타를 버린 록, 그리고 뉴메탈의 정점.
라디오헤드는 기타를 거의 버리고 전자음악과 실험으로 록의 경계를 넓혔습니다. 같은 해 린킨 파크의 데뷔 앨범은 21세기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 중 하나가 되며 뉴메탈의 정점을 찍었고, 에미넴은 가장 빨리 팔린 랩 앨범 기록을 세웠습니다.
주머니 속 1,000곡, 그리고 짧고 건조한 기타.
애플의 아이팟과 2003년 아이튠즈 스토어로 사람들은 앨범 대신 곡 단위로 음악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스트록스의 『Is This It』이 뉴메탈의 과잉에 맞서 1970년대식 짧고 건조한 기타 록을 되살렸고, 제이지의 『The Blueprint』에서는 신인 프로듀서 칸예 웨스트가 소울 샘플을 빠르게 돌린 사운드를 깔았습니다.
축구장의 응원가, 그리고 남부의 시대.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기타 리프는 훗날 전 세계 축구 경기장의 응원가가 됐습니다. 같은 해 아웃캐스트의 「Hey Ya!」가 국민 히트곡이 되고, 애틀랜타의 T.I.는 앨범 제목으로 마약 거래 장소를 뜻하는 ‘트랩’을 장르 이름으로 만들었습니다. 뉴욕과 LA 중심이던 힙합에 남부의 시대가 열립니다.
갱스터가 아닌 래퍼, 전쟁을 비판한 펑크 오페라.
칸예 웨스트는 마약상이 아니라 중산층 대학 중퇴생의 시선으로 신앙, 불안, 소비주의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린 데이는 이라크 전쟁을 비판한 펑크 록 오페라로 다시 정상에 섰습니다.
인터넷이 띄운 밴드.
팬들이 데모를 온라인에 퍼뜨리면서 먼저 유명해진 악틱 몽키스의 데뷔 앨범이 영국 역사상 가장 빨리 팔린 데뷔 앨범이 됐습니다. 마이스페이스를 중심으로 마이 케미컬 로맨스 같은 이모와 팝펑크가 10대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원하는 만큼 내라, 그리고 갱스터 랩의 퇴조.
라디오헤드는 새 앨범을 음반사 없이 웹사이트에 올리고 가격을 듣는 사람이 정하게 했습니다. 같은 해 칸예와 50센트가 같은 날 앨범을 내고 겨뤄 칸예가 이겼는데, 거친 갱스터 랩에서 다양한 힙합으로 주도권이 넘어간 상징이 됐습니다. 소울자 보이의 「Crank That」은 유튜브 춤 따라하기로 1위에 오른 첫 대형 히트였습니다.
스트리밍의 시작, 오토튠으로 부른 이별.
스포티파이가 서비스를 시작하며 스트리밍 시대가 열렸습니다. 칸예는 랩 대신 오토튠을 입힌 노래로 이별과 상실을 고백했고, 당시엔 이상한 실험작이었던 이 앨범이 드레이크를 비롯한 다음 세대 전체의 청사진이 됩니다.
스트리밍과 힙합의 왕좌
스트리밍 횟수가 차트에 반영되면서 반복해서 듣는 젊은 층의 음악, 즉 힙합이 대중음악의 중심이 됩니다. 록은 차트에서 밀려나고, 장르의 경계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맥시멀리즘의 정점.
칸예 웨스트는 앨범마다 소리를 바꾸며 힙합의 실험을 이끌었습니다. 같은 해 드레이크가 랩과 노래를 오가는 감성으로 2010년대 스트리밍 시대 최대의 스타가 되기 시작합니다.
시카고의 음산한 소리, 컴턴의 영화 같은 하루.
시카고의 치프 키프를 중심으로 폭력적이고 음산한 드릴이 나왔고, 영국으로 건너가 UK 드릴이 됩니다. 같은 해 켄드릭 라마는 컴턴에서 자란 소년의 하루를 영화처럼 구성한 앨범을 냈습니다.
빌보드가 스트리밍을 세기 시작하다.
빌보드가 스트리밍 횟수를 앨범 차트에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힙합이 가장 큰 혜택을 봤습니다. TR-808의 깊은 베이스와 잘게 쪼갠 하이햇의 애틀랜타 트랩이 전 세계 대중음악의 기본 사운드가 됩니다. 같은 해 키스의 진 시먼스는 록이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Alright」, 시위의 구호가 된 노래.
켄드릭 라마는 재즈, 펑크, 소울을 바탕으로 흑인의 역사와 정체성을 다뤘고, 수록곡 「Alright」은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의 구호가 됐습니다.
유언이 된 앨범.
데이비드 보위는 죽음을 다룬 마지막 앨범을 내고 이틀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같은 해 프린스가 떠났고, 챈스 더 래퍼는 음반사 없이 스트리밍으로만 낸 앨범으로 그래미를 받아 그래미의 규정까지 바꿨습니다.
가장 많이 소비되는 장르가 바뀌다.
미국에서 힙합/R&B가 록을 제치고 가장 많이 소비되는 장르가 됐습니다. 1950년대 이후 록의 자리를 힙합이 가져간 순간입니다. 카디 비의 「Bodak Yellow」는 로린 힐 이후 처음으로 여성 래퍼 솔로곡 1위가 됐고, 사운드클라우드에 침실에서 만든 곡을 올리던 10대 래퍼들이 펑크와 이모의 감성을 섞은 랩으로 스타가 됐습니다. 그러나 릴 핍, 엑스엑스엑스텐타시온, 맥 밀러, 주스 월드가 2017~2019년에 20대로 잇따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클래식과 재즈가 아닌 첫 퓰리처 음악상.
켄드릭 라마의 『DAMN.』이 퓰리처상 음악 부문을 받았습니다. 차일디시 감비노의 「This Is America」는 총기 폭력과 인종 문제를 다룬 충격적인 뮤직비디오와 함께 랩 곡 최초로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와 올해의 노래를 받습니다. 같은 해 비욘세는 흑인 여성 최초로 코첼라 헤드라이너가 됐습니다.
컨트리 차트에서 빠진 컨트리-랩.
틱톡 밈으로 퍼진 릴 나스 엑스의 곡을 빌보드가 컨트리가 충분하지 않다며 컨트리 차트에서 빼자 인종적 장르 구분 논란이 일었습니다. 리믹스와 함께 역대 최장인 19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장르라는 경계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상징이 됐습니다.
팬데믹, 틱톡, 그리고 AI
공연이 멈추고, 짧은 영상이 히트를 만들고, 옛날 노래가 되살아납니다. 록은 차트가 아니라 공연과 바이닐과 팬덤의 장르로 자리를 바꾸고, 힙합도 여러 장르 중 하나로 상대화됩니다. AI가 누구의 목소리를 누가 소유하는가를 다시 묻습니다.
게임 속 공연에 1,200만 명.
코로나19로 전 세계 공연이 멈췄습니다. 트래비스 스캇이 게임 『포트나이트』 안에서 연 가상 콘서트에 동시 접속자 1,200만 명 넘게 몰렸습니다. 같은 해 팝 스모크가 스무 살에 총격으로 숨졌고, 플레이보이 카티의 『Whole Lotta Red』는 펑크 록 같은 에너지로 ‘레이지’라는 하위 장르를 만들었습니다. 한 남자의 스케이트보드 영상 하나로 플리트우드 맥의 1977년 곡이 다시 차트에 오르며 틱톡의 힘을 보여줬습니다.
유로비전에서 우승한 록 밴드.
이탈리아의 마네스킨이 유로비전에서 우승하고 세계적으로 히트하며 록 밴드도 여전히 글로벌 스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SOUR』 같은 팝 앨범이 팝펑크 사운드를 빌려 쓰면서 2000년대 이모와 팝펑크가 크게 되살아났습니다. 같은 해 트래비스 스캇의 애스트로월드 페스티벌에서 관객이 한꺼번에 몰려 10명이 숨졌습니다.
LP가 CD를 앞지르다.
스트리밍 시대에 역설적으로 LP 판매가 계속 늘어, 미국에서 판매 수량으로 1987년 이후 처음 CD를 앞질렀습니다. 같은 해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에 메탈리카의 1986년 곡이 나오면서 10대들이 메탈리카를 새로 들었습니다.
AI가 되살린 마지막 비틀즈 곡.
쿨 허크의 파티 이후 50년을 기념했지만, 같은 해 몇 달 동안 힙합 곡이 빌보드 1위에 오르지 못하며 힙합의 위기론이 나왔습니다. 드레이크와 더 위켄드의 목소리를 AI로 흉내 낸 가짜 곡이 바이럴됐다가 삭제됐고, 비틀즈는 존 레논의 낡은 카세트 데모에서 AI로 목소리를 분리해 마지막 곡 「Now and Then」을 완성했습니다.
힙합 역사상 가장 큰 디스전.
두 사람이 몇 주 동안 서로를 공격하는 곡을 주고받았고, 켄드릭의 「Not Like Us」가 결정타가 되어 1위에 올랐습니다. 같은 해 샤부지의 컨트리-힙합 곡이 「Old Town Road」와 같은 19주 1위를 기록했고, 린킨 파크는 새 보컬과 재결성했습니다.
한 시대의 끝과 새로운 질문.
「Not Like Us」가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와 올해의 노래를 받았고, 켄드릭은 역대 가장 많이 시청된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 섰습니다. 7월 블랙 사바스는 고향 버밍엄에서 원년 멤버들의 마지막 공연을 열었고, 오지 오스본은 몇 주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면을 쓴 메탈 밴드 슬립 토큰이 빌보드 앨범 1위에 올랐고, 오아시스는 16년 만에 재결합 투어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스트리밍에서 월 100만 명 넘게 들은 록 밴드가 실은 AI로 만든 가상 밴드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