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동물 그림 중 하나.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의 동굴에서 발견된 멧돼지 그림은 4만 5천 년이 넘은 것으로 측정됐습니다. 미술이 유럽에서 시작됐다는 오래된 생각을 바꾼 발견입니다.
동굴의 들소부터 AI가 그린 초상화까지
문자보다 그림이 먼저였습니다. 사람들은 동굴 벽에 동물을 그리고, 작은 조각상을 깎았습니다. 왜 그렸는지는 알 수 없고, 사냥 주술 같은 설명도 추측일 뿐입니다.
가장 오래된 동물 그림 중 하나.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의 동굴에서 발견된 멧돼지 그림은 4만 5천 년이 넘은 것으로 측정됐습니다. 미술이 유럽에서 시작됐다는 오래된 생각을 바꾼 발견입니다.
바위의 굴곡을 살린 사자와 말.
프랑스 쇼베 동굴의 벽화는 3만 년이 넘었는데도 겹쳐 그린 선으로 움직임을 표현하고, 바위의 굴곡을 이용해 입체감을 냈습니다. 미술은 처음부터 서툴지 않았습니다.
손바닥만 한 여성 조각상.
오스트리아에서 발견된 약 11cm 크기의 석회암 조각으로, 풍만한 몸이 과장되게 표현됐습니다. 다산의 상징이라는 해석이 많지만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선사시대의 시스티나 성당.
1940년 소년들이 우연히 발견한 프랑스 라스코 동굴에는 들소, 말, 사슴 등 수백 마리의 동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관람객의 숨 때문에 그림이 손상되자 1963년 동굴은 폐쇄됐고, 지금은 복제 동굴을 관람합니다.
이집트 미술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각 부분을 가장 잘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즉 아는 대로 그렸습니다. 이 양식은 거의 3,000년 동안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미술의 규칙이 처음 나타나다.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왕을 새긴 석판으로, 머리와 다리는 옆모습, 눈과 몸통은 정면으로 표현했습니다. 왕은 다른 인물보다 훨씬 크게 그려졌는데, 크기가 실제 크기가 아니라 신분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평화를 띠처럼 나눠 그리다.
메소포타미아 우르의 왕릉에서 나온 상자에는 조개껍데기와 청금석으로 전쟁 장면과 연회 장면이 여러 단의 띠로 나뉘어 상감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를 줄지어 보여주는 방식의 이른 사례입니다.
영원을 위한 건축과 조각.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는 3,800년 넘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 구조물이었습니다. 조각과 벽화는 감상용이 아니라 죽은 왕의 영원한 삶을 위한 것이었고, 인체 비례는 격자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3,000년 규칙의 짧은 예외.
종교 개혁을 시도한 아크나톤 왕 시대의 아마르나 미술은 왕족을 길쭉한 얼굴과 부드러운 몸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해, 엄격한 이집트 양식에서 잠시 벗어났습니다. 왕비 네페르티티의 채색 흉상이 그 대표작입니다.
3,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황금.
어린 나이에 죽은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은 거의 도굴되지 않은 채 1922년 하워드 카터에게 발견됐습니다. 금과 보석으로 만든 장례 가면은 이집트 미술의 상징이 됐습니다.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그대로’를 향한 경쟁이 시작됩니다. 경직된 조각상은 한 세기 만에 숨 쉬는 몸이 되고, 이상적인 비례가 수치로 정해집니다.
이집트처럼 꼿꼿한 청년상.
아르카익기 그리스의 청년 조각상은 왼발을 내딛고 팔을 몸에 붙인 채 정면을 보는, 이집트 조각과 비슷한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입가의 ‘아르카익 미소’가 특징입니다.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실은 몸.
고전기 조각은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싣고 다른 쪽은 느슨하게 둔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살아 있는 듯한 몸을 표현했습니다. 폴리클레이토스는 이상적인 인체 비례를 수치로 정한 『카논』을 쓰고, 이를 「창을 든 남자」로 보여줬습니다.
착시까지 계산한 건축.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은 기둥을 미세하게 안쪽으로 기울이고 가운데를 살짝 부풀려, 멀리서 볼 때 곧고 단단해 보이도록 착시를 보정했습니다.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장식 조각을 총괄했습니다.
최초의 등신대 여성 누드 조각.
프락시텔레스는 목욕하려는 아프로디테를 나체로 조각해 큰 화제가 됐고, 이 작품은 이후 수많은 여성 누드 조각의 원형이 됐습니다. 원작은 사라지고 로마 시대 복제본만 남아 있습니다.
실물 크기의 군대 8,000명.
중국 진시황의 무덤을 지키도록 만든 흙 인형 병사들은 얼굴과 머리 모양이 하나하나 다르게 표현됐습니다.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들에 의해 발견됐습니다.
바람을 맞으며 내려앉는 승리의 여신.
헬레니즘기 조각은 고전기의 고요한 균형 대신 격렬한 움직임과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뱃머리에 내려앉는 날개 달린 여신, 그리고 뱀에게 휘감겨 고통스러워하는 라오콘 군상이 대표적입니다.
로마는 그리스 조각을 열심히 복제하는 한편, 주름과 사마귀까지 새긴 사실적인 초상을 만들었습니다. 콘크리트와 아치로 거대한 공간을 세웠습니다.
화산재가 지켜낸 로마의 일상.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묻힌 폼페이에는 집 안 벽을 장식한 프레스코화가 그대로 남았습니다. 가짜 창문과 기둥으로 공간이 넓어 보이게 하는 착시 기법까지 쓰였습니다.
2,000년 전 사람들의 얼굴.
로마 지배하의 이집트에서는 미라 얼굴 위에 고인의 초상을 나무판에 그려 붙였습니다. 밀랍에 안료를 섞어 그린 생생한 얼굴들은 고대에 이미 사실적인 초상화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나선형으로 감아 올린 전쟁 이야기.
높이 30m의 기둥에 다키아 원정 이야기가 200m 길이의 띠로 나선형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2,50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는 거대한 ‘돌 위의 만화’입니다.
1,900년 된 콘크리트 돔.
로마의 판테온은 지름 43m의 돔 꼭대기에 뚫린 구멍(오쿨루스)으로 빛이 들어옵니다. 철근 없는 콘크리트 돔으로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큽니다.
그리스·로마의 사실주의는 의도적으로 버려집니다. 목적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영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금빛 모자이크와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을 신의 상징으로 만듭니다.
하늘에 매달린 듯한 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에 세운 성당은 돔 아래 창들이 빛의 띠를 만들어 돔이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입니다. 1,000년 가까이 세계 최대의 성당이었습니다.
금빛 배경 위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 황후 일행이 금빛 배경 위에 평면적으로 줄지어 서서 정면을 바라봅니다. 그림자도 깊이도 없이 시간 밖에 있는 듯한 모습은 비잔틴 미술의 특징입니다.
성스러운 그림을 그려도 되는가.
비잔틴 제국에서는 이콘(성화)이 우상숭배라는 주장으로 100년 넘게 성상을 파괴하고 금지하는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이미지가 무엇을 표현할 수 있고 해도 되는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었습니다.
한 쪽에 얽힌 무한한 문양.
아일랜드 수도사들이 만든 복음서 필사본은 동물과 덩굴이 끝없이 얽힌 켈트 문양으로 페이지를 가득 채웠습니다. 중세 필사본 장식의 최고 걸작으로 꼽힙니다.
거대한 산 앞의 작은 사람.
북송의 범관은 화면을 압도하는 거대한 산과 그 아래 아주 작게 그려진 나그네로 자연의 웅장함을 표현했습니다. 송나라 산수화는 서양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풍경을 회화의 중심 주제로 삼았습니다.
70m짜리 자수로 그린 정복 이야기.
1066년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을 길이 약 70m의 천에 자수로 기록했습니다. 장면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방식은 오늘날 만화와 비슷합니다.
벽을 얇게, 창을 크게, 빛으로 가득하게.
생드니 수도원장 쉬제는 성당을 빛으로 채우고자 했습니다. 뾰족한 아치, 리브 볼트, 바깥에서 벽을 받치는 버팀벽(플라잉 버트레스) 덕분에 벽을 얇게 하고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울 수 있었습니다. 노트르담과 샤르트르 대성당이 뒤를 잇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평면적인 인물에 다시 무게와 감정, 공간이 들어옵니다. 그림이 신의 세계뿐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림 속 인물이 무게와 감정을 되찾다.
조토는 파도바의 예배당 벽을 성경 이야기로 채우며, 인물에 묵직한 부피감과 슬픔 같은 감정을 불어넣고 그들이 실제 공간 속에 서 있는 것처럼 그렸습니다. 르네상스의 문을 연 화가로 꼽힙니다.
시에나의 금빛 제단화.
두초는 비잔틴 전통의 금빛 배경을 유지하면서도 부드러운 인물 표현과 이야기 장면을 결합한 거대한 제단화를 그렸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시민들이 행렬을 지어 성당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성인 대신 도시와 들판을 그리다.
시에나 시청에 그린 벽화에서 암브로조 로렌체티는 잘 다스려진 도시의 활기찬 거리와 들판, 그리고 나쁜 정부 아래의 황폐한 모습을 대비했습니다. 종교화가 아닌 정치적 메시지와 풍경을 담은 이른 사례입니다.
피렌체에서 멀어지는 평행선이 한 점으로 모이는 선원근법이 발명되고, 북유럽에서는 유화가 극도로 정밀한 질감을 그려냅니다. 미술은 수학과 과학의 언어를 얻습니다.
거울로 증명한 소실점.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세례당을 그린 판에 구멍을 뚫고, 뒤에서 거울에 비친 그림과 실제 건물을 번갈아 보게 하는 실험으로 선원근법을 시연했습니다. 그는 피렌체 대성당의 거대한 돔(1436년 완공)을 설계한 건축가이기도 합니다.
벽에 구멍이 뚫린 듯한 그림.
마사초는 원근법을 회화에 처음 본격적으로 적용해, 평평한 성당 벽에 깊은 예배당이 실제로 있는 듯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26살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후 화가들의 교과서가 됐습니다.
볼록 거울 속에 비친 방 전체.
얀 반 에이크는 기름에 안료를 섞는 유화 기법을 완성해 모피, 금속, 유리의 질감을 극도로 정밀하게 그렸습니다. 벽에 걸린 작은 볼록 거울 속에는 방과 문 앞의 인물들까지 비쳐 있습니다. 2년 전에는 형과 함께 「헨트 제단화」를 완성했습니다.
그림은 세상을 향해 열린 창이다.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을 기하학적으로 정리해 책으로 펴냈습니다. 그림을 ‘열린 창’으로 보는 그의 생각은 이후 500년 동안 서양 회화의 기본 전제가 됩니다. 원근법 연구는 훗날 데자르그의 사영기하학으로 이어져, 미술이 수학의 한 분야를 낳습니다.
고대 이후 첫 독립 누드 청동상.
도나텔로는 받침대 위에 홀로 선 실물 크기의 누드 청동상을 만들어, 고대 이후 거의 1,000년 만에 그리스·로마 조각의 전통을 되살렸습니다.
화가이자 수학자.
「그리스도의 채찍질」 같은 작품에서 수학적으로 정밀한 공간을 구성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원근법 이론서와 기하학 책을 쓴 수학자이기도 했습니다.
1,000년 만에 다시 그려진 이교의 여신.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에서 보티첼리는 조개 위에 선 비너스를 우아한 선으로 그렸습니다. 기독교 주제가 아닌 그리스 신화를 대형 화면에 그린 것은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보여줍니다.
원근법의 소실점에 그리스도를.
밀라노 수도원 식당 벽에 그린 이 그림은 모든 원근선이 그리스도의 머리로 모이도록 구성됐습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가 실험한 새로운 기법 때문에 완성 직후부터 물감이 벗겨지기 시작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르네상스의 정점을 찍습니다.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진 뒤에는 일부러 비례를 비틀고 공간을 불안하게 만든 매너리즘이 나타납니다.
기괴한 상상의 세계.
네덜란드의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낙원, 쾌락의 세계, 지옥을 세 폭에 걸쳐 수백 개의 기묘한 인물과 생물로 채웠습니다. 400년 뒤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를 선구자로 여겼습니다.
안개처럼 흐려진 윤곽선.
레오나르도는 윤곽선을 안개처럼 부드럽게 흐리는 스푸마토 기법으로 미묘한 미소를 그렸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평생 곁에 두고 고쳤습니다. 해부학, 광학, 기계를 연구한 그의 노트는 예술가이자 과학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리석 속에 갇힌 거인을 꺼내다.
20대의 미켈란젤로는 다른 조각가들이 포기한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로 높이 5m가 넘는 다비드를 조각했습니다. 피렌체 공화국의 자유를 상징하는 작품이 됐습니다.
고대 철학자들이 한 공간에.
바티칸 교황 궁전의 벽화로, 웅장한 건축 공간 속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등 고대 학자들을 배치했습니다. 플라톤의 얼굴은 레오나르도를 닮았다고 전해집니다. 조화와 균형의 극치로 꼽힙니다.
4년 동안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린 창세기.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라며 거절했지만 결국 4년에 걸쳐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창세기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손가락이 닿을 듯한 「아담의 창조」가 가장 유명한 장면입니다.
판화 속의 마방진.
이탈리아에서 원근법을 배워 온 독일의 뒤러는 기하학 책까지 썼습니다. 이 판화에는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모두 34인 4×4 마방진이 새겨져 있고, 맨 아래 가운데 두 칸이 제작 연도 1514를 나타냅니다.
선보다 색으로 형태를 만들다.
베네치아의 티치아노는 윤곽선 대신 색과 붓질로 살결과 천의 질감을 만들어 냈습니다. 피렌체의 ‘선’과 베네치아의 ‘색’이라는 오래된 논쟁의 한쪽 축입니다.
일부러 비튼 비례.
매너리즘 화가들은 르네상스의 완벽한 균형 뒤에, 인체를 일부러 길게 늘이고 공간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파르미자니노의 성모는 이름 그대로 목이 비정상적으로 깁니다.
미술사라는 학문의 시작.
화가이자 건축가인 바사리는 조토부터 미켈란젤로까지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전기를 써서, 미술이 발전해 왔다는 역사의 틀을 처음 세웠습니다. ‘르네상스(재생)’라는 생각도 그의 서술에서 자리 잡았습니다.
농민과 계절의 풍경.
플랑드르의 피터르 브뤼헐은 성인이나 귀족 대신 농민의 일상과 계절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지친 사냥꾼과 얼음 위에서 노는 마을 사람들이 겨울 풍경 속에 펼쳐집니다.
바로크는 극적인 움직임과 빛의 미술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에 맞서 감정을 사로잡는 미술을 후원했고, 신교 국가 네덜란드에서는 시민들이 미술을 사면서 일상의 그림이 꽃핍니다.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빛.
카라바조는 어둠 속에 강한 빛을 비추는 명암법으로 성경 장면을 연극의 한 순간처럼 만들었습니다. 성인을 평범한 거리의 사람처럼 그려 논란을 일으켰고, 그의 극적인 빛은 유럽 전역의 화가들에게 퍼졌습니다.
대각선으로 솟구치는 역동.
플랑드르의 루벤스는 근육질의 인물들이 대각선으로 엉켜 움직이는 거대한 화면으로 바로크의 역동성을 보여줬습니다. 그는 대규모 공방을 운영한 국제적인 화가이자 외교관이었습니다.
대리석이 나뭇잎으로 변하는 순간.
베르니니는 아폴론에게 쫓기던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하는 찰나를 대리석으로 조각했습니다. 손끝에서 잎이 돋고 발이 뿌리로 변하는 모습은 돌이라고 믿기 어렵습니다.
시민 민병대의 단체 초상.
암스테르담 민병대가 주문한 단체 초상화를, 렘브란트는 모두가 나란히 선 기념사진 대신 출동하는 순간의 극적인 장면으로 그렸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교회 대신 시민 계층이 미술의 주요 고객이 됐습니다.
미술을 가르치고 평가하는 국가 기관.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는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를 세워 미술 교육과 평가를 체계화했습니다. 역사화를 가장 높이 치는 장르의 위계와 공식 전람회 ‘살롱’은 200년 동안 프랑스 미술을 지배합니다.
보는 사람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다.
화면 속 화가는 캔버스 앞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뒤쪽 거울에는 왕과 왕비가 비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곧 왕의 자리입니다. 보는 사람과 그림의 관계 자체를 그림의 주제로 만든 작품입니다.
창으로 스며든 조용한 빛.
델프트의 페르메이르는 창가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 속의 조용한 실내와 인물을 그렸습니다. 남은 작품은 30여 점뿐이며,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했다는 가설이 있습니다.
귀족 살롱의 가볍고 화사한 로코코가 유행하다가, 계몽주의와 혁명의 시대에 고대의 엄격함으로 돌아가는 신고전주의가 등장합니다. 왕실의 소장품은 시민에게 공개됩니다.
사랑의 섬으로 떠나는 귀족들.
장난스럽고 화사한 귀족의 놀이.
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그네를 타며 신발을 날리고, 덤불 속 연인이 이를 올려다봅니다. 가볍고 관능적인 로코코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그림입니다.
고대 로마의 엄격함과 시민의 덕.
다비드는 조국을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하는 로마 형제들을 단단한 선과 명확한 구도로 그렸습니다. 로코코의 유희를 버리고 고대의 엄격한 양식으로 시민의 덕을 그린 신고전주의의 선언입니다. 그는 이후 프랑스 혁명에 깊이 관여합니다.
왕의 그림이 시민의 것이 되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왕실 소장품을 몰수해 루브르 궁전에서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누구나 들어와 미술을 볼 수 있는 공공 박물관의 모델이 됐습니다. 같은 해 다비드는 암살된 혁명가를 그린 「마라의 죽음」을 완성합니다.
이성보다 감정을, 질서보다 숭고한 자연과 폭력과 광기를 그리는 낭만주의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1839년, 2,000년 동안 미술의 목표였던 ‘똑같이 재현하기’를 기계가 해내기 시작합니다.
총구 앞에 팔을 벌린 사람.
고야는 나폴레옹 군대가 마드리드 시민을 처형하는 장면을 영웅도 영광도 없이 그렸습니다. 전쟁의 폭력을 고발한 근대 최초의 그림 중 하나로 꼽히며, 피카소의 「게르니카」로 이어집니다.
숭고한 자연 앞에 선 개인.
독일의 카스파어 다비트 프리드리히는 안개 낀 산봉우리 위에서 등을 보이고 선 남자를 그렸습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 즉 ‘숭고’는 낭만주의의 핵심 감정입니다.
실제 해난 사고를 거대한 화폭에.
난파선 생존자들이 뗏목 위에서 굶주림과 죽음에 맞선 실제 사건을 7m 넘는 화면에 그렸습니다. 제리코는 시신과 생존자를 직접 연구하며 그림을 준비했습니다.
바리케이드 위의 깃발.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을 기념해 삼색기를 든 여신이 시민들을 이끄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격렬한 색과 움직임은 다비드의 엄격한 선과 대비되는 낭만주의 회화의 특징입니다.
유럽을 뒤흔든 일본 목판화.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목판화 연작 『후가쿠 36경』 중 한 장으로, 거대한 파도 뒤로 작은 후지산이 보입니다. 수십 년 뒤 일본 목판화가 유럽에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평면적인 색면과 대담한 구도가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기계가 세상을 그대로 찍다.
프랑스 정부는 다게르의 사진술을 공개했고, 영국에서는 탤벗이 종이 음화 방식을 발표했습니다. 2,000년 동안 미술의 핵심 목표였던 ‘똑같이 재현하기’를 기계가 더 잘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의 미술사는 이 충격에 대한 반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화실 밖으로 나간 화가들.
미국 화가 존 랜드가 주석 튜브에 물감을 담는 방법을 특허 냈습니다. 그전까지 물감은 돼지 방광에 담아 쓰다 보니 들고 다니기 어려웠습니다. 휴대할 수 있는 물감 덕분에 화가들이 야외에서 직접 빛을 보며 그릴 수 있게 됩니다.
안개와 빛 속으로 질주하는 기차.
영국의 터너는 빗속을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형태가 거의 녹아내린 빛과 색의 소용돌이로 그렸습니다. 산업 시대의 속도와 대기의 효과를 그린 그의 그림은 인상주의를 앞섰습니다.
평범한 삶을 그리는 사실주의가 아카데미에 맞서고, 인상주의는 대상 대신 순간의 빛을 그립니다. 세기말의 후기 인상주의는 형태, 감정, 상징이라는 세 갈래로 20세기 미술의 출발점이 됩니다.
“천사를 보여주면 천사를 그리겠다.”
쿠르베는 고향 마을 사람들의 평범한 장례식을 역사화에나 쓰던 거대한 화면에 그려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상화된 영웅 대신 노동자와 시골 사람들의 현실을 그리는 사실주의의 선언입니다.
살롱이 거부한 그림들의 전시회.
공식 살롱에서 떨어진 작품이 너무 많아 불만이 커지자 나폴레옹 3세는 따로 ‘낙선전’을 열게 했습니다. 이곳에 걸린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옷 입은 신사들 옆에 앉은 나체 여성으로 스캔들을 일으켰고, 2년 뒤 「올랭피아」로 다시 파문을 일으킵니다.
비웃음에서 얻은 이름.
살롱에서 거부당하던 화가들이 독자적인 전시회를 열었고, 한 비평가가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비웃으며 쓴 ‘인상주의자들’이라는 말이 이름이 됐습니다. 이들은 야외에서 순간마다 변하는 빛과 색을 빠른 붓질로 그렸습니다.
색채 과학으로 그린 점들.
쇠라는 물감을 섞지 않고 순수한 색의 작은 점들을 나란히 찍어, 보는 사람의 눈에서 색이 섞이도록 했습니다. 보색 대비와 시각 혼합이라는 당시의 색채 과학 이론을 그대로 적용한 방법입니다.
소용돌이치는 밤하늘.
생레미의 요양원 창밖 풍경을 바탕으로, 고흐는 소용돌이치는 하늘과 불꽃 같은 사이프러스를 굵은 붓질로 그렸습니다. 대상을 정확히 그리는 것보다 감정을 색과 붓질로 표현하는 그의 방식은 표현주의로 이어집니다. 그는 생전에 거의 그림을 팔지 못했습니다.
문명을 떠나 원시와 상징을 찾아서.
고갱은 유럽 문명에 염증을 느끼고 타히티로 떠나, 평면적인 색면과 강렬한 색으로 상징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원시주의는 이후 야수파와 입체파에 영향을 주지만, 식민지 시선이라는 비판도 받습니다.
내면의 불안을 그리다.
노르웨이의 뭉크는 핏빛 하늘 아래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르는 인물로 현대인의 불안을 형상화했습니다.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마음속 감정을 그린 그림으로, 독일 표현주의에 큰 영향을 줍니다.
자연을 원통, 구, 원뿔로.
세잔은 같은 산을 수십 번 그리며, 하나의 고정된 시점 대신 여러 시점에서 본 형태를 색면으로 쌓아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자연을 원통, 구, 원뿔로 다루라는 그의 말과 작업은 입체파로 이어집니다. 피카소는 그를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색이 대상에서 해방되고, 500년 된 원근법이 깨지고, 대상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작가가 미술이라고 선언하면 그것이 미술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집니다.
얼굴을 초록색으로 칠해도 된다.
마티스와 친구들의 강렬한 원색 그림을 본 비평가는 ‘야수들(Fauves)’이라고 불렀습니다. 마티스는 아내의 얼굴에 초록색 줄을 그어 넣으며, 색이 대상의 실제 색을 따를 필요가 없음을 보여줬습니다.
여러 시점을 한 화면에 쪼개 넣다.
피카소는 아프리카 가면에서 영향을 받은 얼굴과 조각난 공간으로 인물을 그렸고, 이어 브라크와 함께 여러 시점에서 본 모습을 한 화면에 겹치는 입체파를 만들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500년 동안 지켜 온 하나의 시점, 원근법을 깬 것입니다. 당시 유행한 4차원과 비유클리드 기하학 이야기가 영향을 줬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경주용 자동차는 승리의 여신상보다 아름답다.
이탈리아의 마리네티는 신문에 선언문을 실어 박물관과 과거를 거부하고 속도, 기계, 도시를 찬양했습니다. 움직임을 연속된 형태로 그린 미래주의 회화가 뒤를 따랐습니다.
그림에서 대상을 없애다.
칸딘스키는 음악처럼 색과 형태만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고 보고 대상이 없는 추상화를 그렸으며, 같은 해 ‘청기사’ 그룹을 결성하고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펴냈습니다.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 하나.
러시아의 말레비치는 흰 바탕에 검은 사각형만 그린 그림을 전시장 모서리 높이, 정교회 이콘을 거는 자리에 걸었습니다. 회화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환원한 ‘절대주의’의 선언입니다.
기성품 변기에 서명하다.
뒤샹은 가게에서 산 남성용 소변기에 가명으로 서명해 ‘샘’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에 출품했다가 거부당했습니다. 작가가 미술이라고 선택하고 선언하면 미술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이 작품은 개념미술의 원점입니다. 같은 해 네덜란드에서는 몬드리안 등이 수직·수평선과 원색만 쓰는 ‘데 스테일’을 시작합니다.
예술과 기술, 공예를 하나로.
그로피우스는 독일 바이마르에 예술과 공예, 산업 디자인을 함께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습니다. 단순하고 기능적인 형태를 추구한 바우하우스는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기준이 됐습니다.
꿈과 무의식을 그리다.
앙드레 브르통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자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1931년 달리는 녹아내리는 시계를 그린 「기억의 지속」으로, 마그리트는 「이미지의 배반」(“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으로 이 흐름을 이끌었습니다.
폭격의 고발, 그리고 박해받은 현대미술.
스페인 내전 중 게르니카 마을이 폭격당하자 피카소는 흑백의 거대한 벽화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습니다. 같은 해 나치 독일은 현대미술을 조롱하고 금지하기 위해 ‘퇴폐미술전’을 열었고, 많은 예술가가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 갑니다.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비디오, 대지미술, 퍼포먼스까지, 무엇이 미술인지의 경계가 계속 넓어집니다.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물감을 뿌리다.
잭슨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펼치고 그 주위를 돌며 물감을 흘리고 뿌렸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작품이 되는 ‘액션 페인팅’으로, 미국 미술이 세계의 중심이 됐음을 알렸습니다.
거대한 색 앞에서의 명상.
마크 로스코는 경계가 흐릿한 큰 색면을 겹쳐 쌓은 그림으로, 보는 사람을 감싸는 정서적 경험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관람객이 그림 앞에서 울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마트 진열대가 미술관으로.
앤디 워홀은 32가지 맛의 수프 캔을 똑같이 그리고, 이후 실크스크린으로 마릴린 먼로와 코카콜라 같은 대중 이미지를 대량으로 찍어 냈습니다. 대량생산과 소비사회의 이미지를 미술로 끌어들인 팝아트입니다.
텔레비전을 붓으로,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백남준은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예술의 재료로 삼아 비디오 아트를 개척했고, 조지프 코수스는 실제 의자, 의자 사진, 사전의 ‘의자’ 정의를 나란히 놓은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로 작품의 핵심은 사물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개념미술을 보여줬습니다. 이듬해 뉴욕에서는 단순한 기하학 형태를 반복하는 미니멀리즘 조각이 주목받습니다.
호수 위에 흙과 돌로 그린 나선.
로버트 스미슨은 미국 유타주의 그레이트솔트호에 흙과 현무암으로 길이 약 460m의 나선형 둑을 쌓았습니다. 미술관을 벗어나 땅 자체를 작품으로 삼은 대지미술의 대표작입니다.
몸 자체를 작품으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6시간 동안 꼼짝 않고 서서, 관객이 탁자 위 72가지 물건(꽃, 깃털부터 칼과 총까지)을 자기 몸에 마음대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작가의 몸과 관객의 참여 자체가 작품이 되는 퍼포먼스 아트입니다.
거리의 낙서에서 미술관으로.
뉴욕 거리에서 그라피티로 활동하던 장미셸 바스키아는 거친 선과 글자, 해골 같은 이미지로 인종과 권력을 다룬 회화로 미술계의 스타가 됐습니다. 27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포름알데히드 수조 속의 죽음.
데미언 허스트는 4m짜리 뱀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담긴 유리 수조에 넣어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충격적인 소재와 시장 감각으로 1990년대 ‘영국의 젊은 예술가들(YBA)’을 대표합니다.
거대 미술관과 경매 시장이 미술의 판도를 좌우하고, 디지털과 AI가 다시 ‘누가 만든 것이 미술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발전소가 현대미술관이 되다.
런던 템스강변의 폐쇄된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테이트 모던이 문을 열었습니다. 거대한 터빈 홀은 대형 설치 작품의 무대가 됐고, 테이트 모던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현대미술관 중 하나가 됐습니다.
4억 5천만 달러짜리 그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살바토르 문디」가 경매에서 약 4억 5천만 달러에 팔려 역대 최고가 미술품이 됐습니다. 진위와 복원 정도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경매장에서 벌어진 두 사건.
10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생성 신경망(GAN)으로 만든 「에드몽 드 벨라미의 초상」이 43만 달러가 넘는 값에 팔렸습니다. 같은 달 소더비에서는 뱅크시의 「풍선과 소녀」가 낙찰 직후 액자 속 파쇄기로 잘려 나갔고, 그 상태로 새 작품이 됐습니다.
디지털 파일 하나에 6,900만 달러.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의 콜라주 「매일: 첫 5,000일」이 대체 불가능 토큰(NFT)으로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6,900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복제가 무한히 가능한 디지털 작품의 ‘소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이 일었습니다.
미술전 1등을 차지한 AI 그림.
미국 콜로라도주 박람회 미술전 디지털 부문에서 Midjourney로 만든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이 1등을 차지해 거센 논쟁이 일었습니다. 같은 해 누구나 글만으로 그림을 만드는 이미지 생성 AI가 대중화되면서, 작가, 저작권, 창작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다시 미술의 중심에 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