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브라만과 아트만은 하나다.
제사 의례 중심의 베다 경전 끝부분인 우파니샤드에서 철학적 사유가 시작됩니다.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과 개인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이 같다는 ‘범아일여’, 행위의 결과에 따라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업과 윤회,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한 해탈이 인도 철학의 기본 틀이 됩니다.
축의 시대의 우파니샤드와 공자, 소크라테스부터 AI의 의식 논쟁까지
철학자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라 부른 시기입니다. 그리스, 인도, 중국, 이스라엘에서 서로 교류 없이 거의 동시에, 신화와 전통의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반성하고 따지는 사유가 시작됩니다. 철기 보급, 도시의 성장, 기존 질서의 붕괴 같은 비슷한 변화가 원인으로 꼽힙니다.
인도: 브라만과 아트만은 하나다.
제사 의례 중심의 베다 경전 끝부분인 우파니샤드에서 철학적 사유가 시작됩니다.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과 개인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이 같다는 ‘범아일여’, 행위의 결과에 따라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업과 윤회,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한 해탈이 인도 철학의 기본 틀이 됩니다.
그리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이오니아의 무역 도시에서는 여러 문화가 섞여 하나의 신화를 절대시하기 어려웠습니다. 탈레스는 세상 만물의 근원(아르케)을 신이 아니라 자연에서 찾으려 한 첫 인물로 꼽힙니다. 답보다 질문 방식이 중요합니다. 철학과 과학이 동시에 시작된 순간입니다.
그리스: 근원은 아무 성질도 정해지지 않은 것.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는 근원이 물 같은 특정 물질이 아니라 아무 성질도 정해지지 않은 ‘무한정자(아페이론)’라고 했습니다. 처음으로 추상적인 원리를 내세운 것입니다.
그리스: 만물의 근원은 수다.
피타고라스는 철학과 종교 공동체를 이끌며 만물의 근원이 수라고 가르쳤고, 영혼의 윤회를 믿었습니다. 수학과 철학, 신비주의가 한데 얽힌 그의 학파는 플라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그리스에서는 세계가 변하는지 변하지 않는지를 두고 대립이 벌어지고, 민주정 아테네에서 관심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 갑니다. 같은 시기 인도에서는 붓다가, 중국에서는 공자가 가르칩니다.
그리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중국: 사람다움(인)과 예.
주나라의 질서가 무너진 춘추시대, 공자는 새로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옛 도를 전할 뿐이라며 사람다움(인), 그것이 드러나는 사회적 규범(예), 신분이 아니라 수양으로 될 수 있는 이상적 인간(군자)을 가르쳤습니다. 귀신과 사후 세계에 대해서는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며 현세의 윤리에 집중했습니다. 제자들이 그의 말을 엮은 책이 『논어』입니다.
그리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와 정반대로 변화는 착각이라고 했습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생길 수 없으니 생성과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논리입니다. 감각은 우리를 속이고 이성만이 진리에 이른다는 이성주의의 출발점입니다. 변화 대 불변의 대립은 이후 서양 철학 전체를 관통합니다.
그리스: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제논은 스승 파르메니데스를 옹호하려고 운동이 모순을 낳는다는 역설들을 만들었습니다. 수학에서 무한과 연속의 개념에 2,000년 넘게 충격을 준 역설입니다.
인도: 삶은 고통이고, 그 원인은 집착이다.
왕자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는 늙음, 병, 죽음을 보고 출가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생몰 연대는 학설마다 차이가 큽니다). 고통과 그 원인, 소멸, 길이라는 사성제, 쾌락과 고행의 양극단을 피하는 중도,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해 생겨난다는 연기를 가르쳤습니다. 특히 우파니샤드의 영원한 자아를 부정한 무아 사상은 2,000년 뒤 흄이 거의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같은 시기 마하비라는 모든 생명을 해치지 않는 불살생을 극단까지 추구한 자이나교를 세웠습니다.
그리스: 인간은 만물의 척도.
민주정 아테네에서 민회와 법정의 말솜씨가 성공의 열쇠가 되자, 돈을 받고 수사학을 가르치는 소피스트가 등장했습니다. 프로타고라스는 절대적 진리를 의심하는 상대주의를 내세웠고, 관습(노모스)과 자연(퓌시스)을 구분하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궤변론자’라는 나쁜 이미지는 플라톤이 붙인 것입니다.
그리스: 변하지 않는 원자의 조합이 바뀔 뿐.
엠페도클레스와 데모크리토스는 파르메니데스의 불변과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를 화해시키려 했습니다. 근본 요소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그 조합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4원소설과 원자론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중국: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라.
묵자는 가족을 먼저 사랑하는 유가의 차별적 사랑을 비판하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라는 겸애를 주장했습니다. 사치와 침략 전쟁에 반대했고, 행위를 그 결과의 이익으로 판단했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적입니다. 한때 유가와 맞먹는 세력이었지만 이후 사라졌습니다.
그리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소크라테스는 길거리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고 대답의 모순을 드러내는 문답법으로 사람들을 깨우쳤습니다. 덕은 앎이며, 부를 좇기 전에 영혼을 돌보라고 했습니다. 신을 믿지 않고 젊은이를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도망칠 기회를 거부하고 독배를 마셨습니다. 책을 한 줄도 쓰지 않았고 플라톤의 대화편으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후 서양 철학 전체의 틀을 세웁니다. 중국은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사상가들이 각자의 답을 들고 군주들을 찾아다니는 제자백가의 시대입니다.
그리스: 감각 세계 너머의 이데아.
스승의 억울한 죽음을 본 플라톤은 아테네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는 감각으로 보는 세계는 변하는 그림자이고 그 너머에 영원불변하는 참된 실재인 이데아가 있다고 봤습니다. 동굴의 비유, 배움은 이데아를 다시 떠올리는 것이라는 상기설, 이성이 기개와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는 영혼 3분설과 철인왕의 『국가』가 그의 대표 사상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 전체가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고 평했습니다.
중국: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노자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도덕경』은 이 무렵 정리된 것으로 봅니다(노자의 실존 여부도 불확실합니다). 만물의 근원인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무위자연이 최선이라고 했습니다. 물처럼 부드럽고 낮은 것이 결국 강한 것을 이긴다고 봤고, 유가의 인위적 도덕을 오히려 혼란의 원인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리스: 형상은 사물 안에 있다.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학교를 세우고 거의 모든 학문을 체계화했습니다. 이데아를 별도 세계에 두지 않고 형상이 개별 사물 안에 질료와 함께 있다고 봤으며, 4원인설, 가능태와 현실태, 삼단논법, 그리고 행복은 이성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삶이고 덕은 지나침과 모자람 사이의 중용이라는 윤리학을 남겼습니다. 플라톤이 위를, 그가 땅을 가리키는 「아테네 학당」의 구도처럼, 이상 대 현실의 대립은 근대 합리론 대 경험론까지 반복됩니다.
그리스: 판단을 멈추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알렉산드로스 원정에 동행해 인도까지 갔던 피론은 어떤 주장이든 반대 주장도 똑같이 그럴듯하니 판단을 중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마음의 평정이 온다는 것입니다.
중국: 인간은 본래 선하다, 그리고 나비의 꿈.
맹자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누구나 측은한 마음이 든다는 예로 인간에게 선한 마음의 싹이 있다는 성선설을 펴고, 백성을 위하지 않는 군주는 바꿀 수 있다는 혁명론까지 주장했습니다. 같은 시기 장자는 꿈에서 나비가 된 뒤 깨어나 내가 나비 꿈을 꾼 건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 건지 묻는 호접몽으로, 크다·작다, 옳다·그르다 같은 구분은 관점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 죽음이 있을 때 우리는 없다.
알렉산드로스 이후 도시국가가 제국에 흡수되자 철학의 관심은 혼란한 세상에서 개인이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얻을지로 옮겨 갑니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쾌락이라 했지만, 그것은 방탕이 아니라 몸에 고통이 없고 마음에 불안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죽으면 원자가 흩어질 뿐이니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라.
키티온의 제논이 아테네의 채색 주랑(스토아)에서 가르친 데서 이름이 왔습니다. 우주는 이성(로고스)으로 질서 잡혀 있고 인간도 그 이성을 나눠 가졌으니,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 덕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판단이라는 생각은 현대 인지행동치료에 직접 영향을 줬고, 모든 인간이 세계의 시민이라는 세계시민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중국은 법가로 통일되고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습니다. 순자와 한비자는 인간 본성에 대한 맹자와 정반대의 답을 내놓습니다.
중국: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다.
순자는 인간이 본래 이기적인 욕망을 따르므로 그대로 두면 다툼이 생긴다는 성악설을 펴고, 예와 교육으로 본성을 교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맹자 대 순자는 서양의 루소 대 홉스와 비슷한 구도입니다.
중국: 도덕이 아니라 법과 상벌로.
순자의 제자 한비자는 성악설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엄격한 법과 상벌, 군주의 권모술수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나라가 법가를 채택해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했습니다. 서양의 마키아벨리와 자주 비교됩니다.
중국: 2,000년 국가 이념의 시작.
한나라 무제는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박사 제도를 세우고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이후 2,000년 동안 유교는 동아시아의 정치, 교육, 가족 윤리를 지배합니다.
로마에서는 노예와 황제가 같은 스토아 철학을 실천하고,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 신학의 토대가 됩니다. 인도에서는 대승불교 철학이 정교한 논리로 꽃핍니다.
로마: 황제의 스승과 노예 출신 철학자.
네로의 스승이자 정치인이던 세네카는 편지 형식으로 스토아의 삶을 가르쳤고, 노예 출신의 에픽테토스는 우리에게 달린 것과 달리지 않은 것을 구분하라는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인도: 모든 것에는 고정된 본질이 없다.
나가르주나(용수)는 모든 것이 고정된 본질 없이 비어 있다는 공 사상과, 있다·없다 양극단을 모두 부정하는 중관 철학을 세웠습니다. 정교한 논리로 모든 개념의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이 매우 철학적입니다.
로마: 전쟁터 막사에서 자신에게 쓴 일기.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게르만족과의 전쟁 중 막사에서 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글을 썼습니다. 노예와 황제가 같은 철학을 실천했다는 것 자체가 스토아의 보편성을 보여줍니다.
인도: 논리학에서 요가까지.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여섯 학파가 체계를 갖춥니다. 정교한 논리학과 인식론을 발전시킨 니야야,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편 상키야, 수행법을 체계화한 요가, 우파니샤드를 해석하는 베단타 등이 있습니다.
로마: 모든 것은 일자에서 흘러나왔다.
플로티노스는 모든 것이 궁극의 근원인 ‘일자’에서 빛처럼 흘러나왔고, 영혼은 다시 그 근원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신비주의적인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인도: 세계는 마음이 만든 것이다.
로마: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지 않으면 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철학으로 기독교 신학을 체계화했습니다. 내면을 깊이 성찰한 최초의 자서전 『고백록』에서 시간을 마음의 확장으로 보는 독창적인 시간론을 폈고, 악은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핍이라고 답했습니다. 410년 로마가 약탈당하자 『신국론』에서 지상의 나라와 신의 나라를 구분했습니다.
서유럽이 그리스 문헌 대부분을 잃어버린 동안, 이슬람 세계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하고 발전시킵니다. 인도와 중국에서는 베단타와 선불교가 꽃핍니다.
사형을 기다리며 쓴 책.
반역 혐의로 사형을 기다리던 보에티우스는 철학이 여인으로 나타나 운명의 변덕을 견디는 법을 가르치는 책을 썼습니다. 스토아적 성격이 강하며, 중세 내내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입니다.
중국: 문자보다 직관적 깨달음.
1세기경 전래된 불교는 도가와 섞이며 중국화되었고, 문자와 경전보다 마음을 곧바로 꿰뚫는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종이 나왔습니다. 혜능의 가르침은 동아시아 선불교의 주류가 됩니다.
인도: 브라만만이 실재이고 세계는 환영이다.
샹카라는 브라만만이 유일한 실재이고 다양한 세계는 환영(마야)이라는 불이일원론(아드바이타 베단타)을 체계화했습니다. 이후 힌두 철학의 주류가 됩니다.
이슬람: 감각이 없어도 나는 내가 있음을 안다.
이븐 시나는 사물이 무엇인지(본질)와 실제로 있는지(존재)를 구분했고, 감각이 모두 차단된 채 허공에 떠 있는 사람도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안다는 사고실험을 남겼습니다. 600년 뒤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
안셀무스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며, 신을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로 정의하면 그런 존재는 실제로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논증을 제시했습니다. 칸트가 반박했고 지금도 논쟁되는 논증입니다.
이슬람: 불이 솜을 태우는 것을 보지는 못한다.
알가잘리는 불이 솜을 태우는 것을 수없이 봐도 우리는 둘이 함께 일어나는 것을 볼 뿐 불이 태운다는 필연적 연결은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700년 뒤 흄의 인과 비판과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유럽에 대학이 생기고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이 이슬람 세계를 거쳐 대량으로 들어옵니다. 엄격한 논리로 신학을 체계화하는 스콜라철학이 정점에 이르고, 중국에서는 성리학이 유교를 철학적으로 재건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인간’, ‘빨강’ 같은 보편 개념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두고, 존재한다는 실재론과 이름일 뿐이고 개별자만 있다는 유명론이 수백 년간 논쟁했습니다. 아벨라르는 그 사이의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슬람과 유대: 아리스토텔레스를 되살리다.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는 알가잘리에 맞서 철학을 옹호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방대한 주석을 써, 유럽에서 그냥 ‘주석가’로 불렸습니다. 유대 철학자 마이모니데스는 『방황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에서 유대교 신앙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조화시켰습니다.
중국: 만물은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다.
송나라의 주희는 불교와 도교의 형이상학에 대응해 유교를 철학적으로 재건했습니다. 만물은 원리인 이(理)와 물질적 기운인 기(氣)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의 본성이 곧 이라고 봤으며, 사물의 이치를 하나하나 탐구해 앎에 이르는 격물치지를 강조했습니다. 성리학은 이후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가 이념이 됩니다.
이성과 신앙은 충돌하지 않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대규모로 종합했습니다.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영역과 계시로만 알 수 있는 영역을 나눴고, 경험에서 출발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 길’, 그리고 이성으로 알 수 있는 도덕 법칙인 자연법 이론을 세웠습니다. 자연법은 서양 법사상과 인권 개념의 기초가 됩니다.
필요 이상으로 존재를 늘리지 말라.
철저한 유명론자 윌리엄 오컴의 이 원칙은 지금도 과학과 통계학에서 모델 선택의 원칙으로 쓰입니다. 그는 신앙과 이성을 분리해 중세의 종합을 해체하고 근대 경험론의 길을 열었습니다.
고대 문헌이 재발견되고, 종교개혁으로 교회의 권위가 흔들리고, 과학혁명이 시작됩니다.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무게가 옮겨 갑니다.
중국: 이치는 바깥 사물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다.
어리석음의 여신이 교회를 풍자하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는 어리석음의 여신의 입을 빌려 성직자와 학자들의 위선을 풍자했습니다. 고전 문헌을 원전으로 되돌아가 읽는 인문주의는 종교개혁의 토양이 됩니다.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안전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어떻게 해야 마땅한가가 아니라 실제로 권력을 얻고 유지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물었습니다. 정치를 도덕에서 분리한 근대 정치학의 출발점입니다.
어디에도 없는 곳.
토머스 모어는 사유재산이 없는 가상의 섬을 그려 당시 영국 사회를 비판했습니다.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의 유토피아는 이상 사회를 가리키는 말이 됐습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과학혁명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이 무너지자, 2,000년 권위가 틀렸다면 우리가 확실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철학의 질문이 ‘무엇이 있는가’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로 바뀝니다. 대륙의 합리론은 이성에서, 영국의 경험론은 감각에서 답을 찾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관찰과 실험에서 일반 법칙을 끌어내는 귀납법을 주장하고, 인식을 왜곡하는 편견을 종족, 동굴, 시장, 극장의 네 가지 우상으로 분석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수학처럼 확실한 토대를 찾기 위해 감각도, 지금이 꿈이 아니라는 것도, 2+3=5조차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나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지식의 출발점이 신이나 세계가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가 된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나눈 그의 심신이원론은 정신과 몸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라는 문제를 남겼고, 이 문제는 AI와 의식 논쟁까지 이어집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영국 내전을 겪은 홉스는 국가가 없는 자연 상태의 삶이 “고독하고, 가난하고, 끔찍하고, 잔인하고, 짧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계약을 맺고 강력한 주권자에게 권리를 넘긴다는 사회계약론을 폈습니다.
신이 곧 자연이다.
유대 공동체에서 파문당하고 렌즈를 깎으며 살았던 스피노자는 실체는 단 하나이고 그것이 신이자 곧 자연이며, 정신과 물질은 그 두 측면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에티카』를 유클리드의 『원론』처럼 정의, 공리, 정리, 증명의 형식으로 썼고, 자유란 필연을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사후에 출간됐습니다.
마음은 태어날 때 백지다.
로크는 마음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이고 모든 관념은 경험에서 온다며 데카르트의 타고난 관념을 부정했습니다. 같은 해 『통치론』에서는 인간이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자연권을 가지며 정부가 이를 어기면 저항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미국 독립선언서에 직접 영향을 줍니다.
이성으로 미신과 권위를 깨고 인류를 진보시킬 수 있다는 낙관이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그 한편에서 경험론은 흄에 이르러 인과와 귀납조차 정당화할 수 없는 회의주의에 도달합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
버클리는 우리가 직접 아는 것은 감각뿐이니 감각 너머의 물질이 있다고 말할 근거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나무는 신이 지각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뉴턴의 미적분을 “사라진 양의 유령”이라고 공격한 그 버클리 주교입니다.
이 세계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다.
라이프니츠는 세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 무수한 정신적 단위인 모나드로 이루어져 있고 신이 미리 정한 조화로 상호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으며,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충족이유율을 원리로 삼았습니다. 모든 사고를 계산으로 바꾸는 보편 기호 언어라는 그의 꿈은 현대 논리학과 컴퓨터로 이어집니다.
인과는 마음의 습관이다.
흄은 경험론을 끝까지 밀어붙였습니다. 당구공이 부딪히는 것을 수없이 봐도 필연적 연결 자체는 경험하지 못하니 인과는 반복에서 생긴 습관이고, 해가 내일도 뜬다는 보장도 없다는 귀납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내면을 들여다봐도 지각의 흐름만 있을 뿐이니 자아는 지각의 다발이라고 했고(붓다의 무아와 거의 같은 결론), ‘~이다’에서 ‘~해야 한다’를 끌어낼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권력을 셋으로 나누라.
계몽 지식의 집대성.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과학, 기술, 예술의 모든 지식을 정리하는 『백과전서』를 펴내기 시작했습니다. 검열과 금지 속에서도 20년 넘게 이어지며 계몽사상을 퍼뜨렸습니다. 1759년 볼테르는 『캉디드』에서 라이프니츠의 ‘최선의 세계’를 신랄하게 풍자했습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
계몽주의의 이단아 루소는 문명이 인간을 타락시켰고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선했다고 봤습니다(홉스와 정반대). 개인 이익의 합이 아니라 공동선을 지향하는 일반의지에 따른 국가를 주장해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칸트는 서양 철학사의 가장 큰 분수령입니다. 이전의 거의 모든 철학이 칸트로 흘러들고, 이후의 거의 모든 철학이 칸트에서 흘러나옵니다. 칸트가 남긴 물자체를 없애고 모든 것을 정신의 활동으로 설명하려는 독일 관념론이 헤겔에서 완성됩니다.
대상이 우리 인식에 맞춰진다.
흄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는 칸트는 관점을 뒤집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대상을 받아들이는 틀이고, 인과 같은 개념은 우리 지성이 경험을 정리하는 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는 습관이 아니라 모든 경험에 필연적으로 적용됩니다. 대신 우리는 틀을 통해 드러난 현상만 알 수 있고 그 너머의 물자체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필연적이라 본 유클리드 기하학은 19세기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흔들립니다.
감히 알려고 하라.
인간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는 도덕이 결과가 아니라 의무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네 행동의 원칙이 보편 법칙이 되어도 괜찮도록 행동하라, 그리고 인간을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라는 정언명령은 현대 인간 존엄과 인권 개념의 철학적 기초가 됐습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벤담은 옳은 행동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낳는 행동이라고 하고, 쾌락과 고통을 계산해 법과 제도 개혁에 적용하려 했습니다. 결과로 도덕을 판단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의무론과 정반대입니다.
여성에게도 이성과 교육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이 열등해 보이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이성적 존재로서 교육받고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사는 자유 의식의 진보다.
헤겔은 실재가 스스로 전개되는 과정이고 그 주체는 절대정신이라고 봤습니다. 하나의 입장은 내적 모순 때문에 반대 입장을 낳고 둘은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된다는 변증법(‘정-반-합’이라는 말은 헤겔이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동하는 노예가 오히려 자기의식을 얻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유명합니다. 이후 거의 모든 철학이 헤겔을 계승하거나 반발하며 만들어집니다.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의 시계추.
헤겔을 ‘사기꾼’이라 부른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물자체가 사실 맹목적이고 끝없이 갈망하는 의지라고 봤습니다. 욕망은 채워지지 않으면 고통이고 채워지면 권태라는 염세주의를 폈고, 예술과 금욕, 연민에서 구원을 찾았습니다. 우파니샤드와 불교에 깊이 영향받은 첫 주요 서양 철학자로, 동서 철학이 처음 본격적으로 만난 지점입니다.
산업혁명과 혁명의 시대, 헤겔의 거대한 체계에 반발해 개인과 실존, 물질적 삶, 그리고 가치 자체를 묻는 철학이 등장합니다. 영국에서는 공리주의가, 미국에서는 실용주의가 자랍니다.
주체적 진리와 신앙의 도약.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체계가 살아 있는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개인이 열정적으로 붙드는 주체적 진리를 강조했고, 자유 앞에서 느끼는 현기증인 불안을 처음 철학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물질적 생산과 경제 관계로 뒤집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정신이 아니라 계급투쟁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만 해왔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1867년 『자본』에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가 겪는 소외와 그 체제의 모순을 분석했습니다. 20세기 세계사를 가장 크게 바꾼 철학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는 제한될 수 없다.
존 스튜어트 밀은 쾌락에도 질적 차이가 있다며 공리주의를 수정했고(“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낫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는 위해 원칙을 세웠습니다. 여성 참정권도 일찍부터 주장했습니다.
개념의 의미는 그 실천적 결과에 있다.
퍼스는 개념의 의미가 그것이 낳는 실천적 결과에 있다고 했고, 윌리엄 제임스는 믿음이 참인지는 삶에서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로 판단된다고 했으며, 듀이는 이를 교육과 민주주의 이론으로 확장했습니다.
2,000년 만에 다시 만든 논리학.
프레게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처음으로 논리학을 완전히 새로 만들어 현대 기호논리학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별’이 같은 금성을 가리키지만 뜻은 다르다는 지시체와 뜻의 구분은 언어철학의 출발점이 됩니다.
니힐리즘이 온다.
니체는 근대 과학과 계몽으로 기독교 신앙이 더 이상 유럽 문화의 토대가 될 수 없게 됐고, 그 위에 세워졌던 모든 가치가 무너지는 니힐리즘이 온다고 진단했습니다. 도덕의 기원을 파헤치는 계보학, 권력에의 의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위버멘쉬, 그리고 이 삶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긍정할 수 있느냐는 영원회귀를 내놓았습니다. 사후 누이에 의해 왜곡되어 나치에 이용됐지만, 본인은 반유대주의와 독일 민족주의를 경멸했습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과 새로운 물리학 속에서 철학의 중심 질문이 ‘언어’로 옮겨 가고, 철학은 영미의 분석철학과 독일·프랑스의 대륙철학으로 갈라집니다.
사태 자체로!
후설은 세계에 대한 선입견을 괄호 치고 의식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현상을 정밀하게 기술하자는 현상학을 세웠습니다. 의식은 언제나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라는 지향성 개념이 핵심입니다.
문법은 논리를 숨긴다.
러셀은 일상 언어의 문법적 형태가 그 논리적 형태를 숨기고 있다는 분석을 보여줬고, 1910년부터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로 수학 전체를 논리에서 이끌어내려 했습니다. 반전 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했고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일본: 선불교와 서양 철학의 결합.
니시다 기타로는 선불교와 서양 철학을 결합해 ‘순수경험’과 ‘절대무’의 철학을 세우고 교토학파를 열었습니다. 동양 철학이 서양 철학의 언어로 자기를 표현하려 한 첫 체계적 시도로 평가받습니다.
언어는 차이의 체계다.
사후 출간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는 언어를 기호들 사이의 차이로 의미가 생기는 구조로 봤습니다. 구조주의의 출발점입니다. 같은 해 듀이는 경험을 통한 학습을 강조한 『민주주의와 교육』을 펴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계를 그리는 그림이며, 의미 있는 문장은 사실을 그린다고 봤습니다. 그러면 윤리, 신, 삶의 의미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는 이걸로 철학 문제가 다 해결됐다고 보고 시골 초등학교 교사가 됐습니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의 의미.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이 플라톤 이래 존재하는 것들만 다뤘을 뿐 존재 자체의 의미는 잊어 왔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세계를 바깥에서 관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이미 세계 안에 던져져 살아가는 존재(세계-내-존재)이며, 자신의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본래적인 삶을 산다고 봤습니다.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하고 대학 총장을 맡았던 일은 지금도 그의 철학에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검증할 수 없는 말은 무의미하다.
카르납, 슐리크 등 빈 학파는 의미 있는 문장은 논리적으로 참이거나 경험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검증 원리로 전통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말로 치부했습니다. 괴델도 이 모임에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나 검증 원리 자체가 검증 불가능하다는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검은 백조 한 마리.
포퍼는 과학과 비과학을 가르는 기준이 검증이 아니라 반증 가능성이라고 했습니다. 흰 백조를 아무리 많이 봐도 “모든 백조는 희다”는 증명되지 않지만 검은 백조 한 마리면 반증됩니다. 흄의 귀납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답입니다. 훗날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를 전체주의의 뿌리로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 한다.
카뮈는 의미를 갈구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괴리를 부조리라 부르고, 바위를 끝없이 굴려 올리는 시지프처럼 부조리를 직시하면서도 반항하며 사는 데서 의미를 찾았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칼은 용도가 먼저 정해지고 만들어지지만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그 후에 스스로 무엇이 될지 만들어 간다고 사르트르는 말했습니다. 인간 본성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니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고, 그 선택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는 노벨 문학상을 거부했습니다.
계몽은 왜 야만으로 이어졌는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망명 중에 계몽적 이성이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변질되어 나치즘 같은 야만으로 이어졌다고 비판했습니다.
전후 철학은 언어의 쓰임, 과학의 구조, 정의로운 사회, 권력과 텍스트, 그리고 기계와 의식을 묻습니다. 대륙철학에서는 구조주의와 그 해체가 이어집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튜링은 이 질문을, 기계가 대화에서 사람과 구별되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시험으로 바꿨습니다. 데카르트의 심신 문제가 컴퓨터 시대에 새로 불붙습니다.
믿음은 그물망으로 경험과 마주한다.
콰인은 논리적으로 참인 문장과 경험으로 참인 문장을 깔끔하게 나눌 수 있다는 구분 자체를 공격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하나 따로가 아니라 전체가 하나의 그물망으로 경험과 마주한다는 것입니다.
단어의 의미는 그 쓰임이다.
사후 출간된 이 책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기 철학을 스스로 비판했습니다. 언어는 명령, 농담, 기도, 인사처럼 수많은 활동에 쓰이고,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쓰이는 언어게임 속의 사용에 있다고 봤습니다. 많은 철학적 문제는 언어가 일상의 쓰임에서 벗어날 때 생기는 혼란이라는 것입니다.
의식 아래의 보이지 않는 구조.
이해는 지평의 융합이다.
과학은 패러다임의 교체로 나아간다.
쿤은 과학이 지식이 차곡차곡 쌓이며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된 틀(패러다임) 안에서 문제를 풀다가 설명되지 않는 이상 현상이 쌓이면 패러다임 자체가 교체되는 혁명을 겪는다고 했습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플로지스톤에서 라부아지에로, 뉴턴에서 아인슈타인으로의 전환이 대표적입니다. 과학사 전체를 다시 읽게 하는 책입니다.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의 재판을 보며, 거대한 악이 괴물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고 명령을 수행한 평범한 관료에게서 나왔다고 분석했습니다. 『전체주의의 기원』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텍스트 속 위계를 무너뜨리다.
데리다는 텍스트가 의존하는 말/글, 이성/감성 같은 이항 대립이 한쪽을 우월하게 놓는 위계를 숨기고 있으며, 그 위계가 텍스트 안에서 스스로 무너지는 지점을 드러내는 해체를 제시했습니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 규칙을 정한다면.
롤스는 자신이 부자일지 가난할지, 어떤 재능을 가질지 모르는 무지의 베일 뒤에서 사회의 규칙을 정한다면, 가장 불리한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가는 원칙을 고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치철학을 부활시킨 책으로, 1974년 노직은 개인의 소유권을 강조하는 자유지상주의로 맞섰습니다.
주관적 경험은 물리로 다 설명되는가.
권력은 정상을 만든다, 그리고 동물 해방.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니체의 계보학을 이어받아, 권력이 위에서 억압하기보다 학교, 병원, 감옥 같은 제도 속에서 사람들을 감시하고 규율하며 ‘정상적인’ 주체를 만든다고 분석했습니다. 같은 해 피터 싱어는 『동물 해방』으로 고통을 느끼는 모든 존재를 윤리의 대상에 넣으며 응용 윤리학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기호를 조작하는 것은 이해가 아니다.
설은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규칙집에 따라 기호만 조작해도 밖에서는 중국어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듯, 컴퓨터도 기호를 조작할 뿐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AI가 정말 이해하는가라는 논쟁의 고전이 됩니다.
강요 없는 토론으로 합의에 이르는 이성.
프랑크푸르트 학파 2세대 하버마스는 이성 자체를 버리지 말고, 사람들이 강요 없이 합리적으로 토론하며 합의에 이르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으로 재건하자고 했습니다.
왜 처리 과정에 경험이 동반되는가.
차머스는 뇌가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설명하는 ‘쉬운 문제’와 달리, 왜 그 처리에 주관적 경험이 동반되는지라는 ‘어려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지금 AI를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있는 문제입니다.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경계는 많이 흐려졌습니다. 철학은 실험과 데이터를 쓰고, 불교 철학과 서양 심리철학을 비교하며, 무엇보다 AI가 던지는 질문에 답하려 합니다.
우리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는가.
보스트롬은 고도로 발전한 문명이 조상의 시뮬레이션을 많이 돌린다면, 우리가 시뮬레이션 속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논증을 내놓았습니다. 데카르트의 악마가 컴퓨터의 언어로 돌아온 셈입니다.
철학적 직관은 정말 보편적인가.
크노브와 니컬스 등은 철학자들이 당연하다고 여겨 온 직관이 문화와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다른지를 설문과 실험으로 직접 조사하는 실험철학을 선언했습니다.
인간보다 똑똑한 기계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보스트롬은 인간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이 등장할 때의 위험과 그 목표를 인간의 가치에 맞추는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뤘습니다. AI 윤리와 안전 연구가 철학의 주요 분야가 되는 계기가 됩니다.
대화하는 기계 앞의 오래된 질문.
대화형 AI가 의식을 가졌다고 주장한 엔지니어의 사건과 대규모 언어 모델의 등장으로, 튜링의 질문, 설의 중국어 방, 차머스의 어려운 문제가 철학 강의실을 넘어 사회 전체의 질문이 됐습니다. 데카르트가 남긴 심신 문제가 가장 실용적인 질문이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