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에게 붉은 흙을 뿌리고 물건을 함께 묻다.
이스라엘의 카프제와 스쿨 동굴에서 붉은 황토(오커)를 뿌리고 사슴뿔 같은 물건을 함께 묻은 현생 인류의 무덤이 발견됐습니다. 네안데르탈인도 시신을 묻었습니다. 이라크 샤니다르 동굴의 꽃가루는 ‘꽃을 바친 장례’로 유명했지만, 동물이 옮겼을 수 있다는 반론이 나왔습니다. 죽은 사람을 묻고 물건을 넣었다는 것은 죽음 이후에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10만 년 전의 무덤부터 최초의 미국인 교황까지, 서양과 동양 두 갈래로
글이 없던 시대의 종교는 무덤과 조각, 거대한 돌기둥으로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정성껏 묻고, 현실에 없는 존재를 새기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 의례를 치른 흔적이 서양과 동양 모든 종교의 공통된 출발점입니다.
죽은 자에게 붉은 흙을 뿌리고 물건을 함께 묻다.
이스라엘의 카프제와 스쿨 동굴에서 붉은 황토(오커)를 뿌리고 사슴뿔 같은 물건을 함께 묻은 현생 인류의 무덤이 발견됐습니다. 네안데르탈인도 시신을 묻었습니다. 이라크 샤니다르 동굴의 꽃가루는 ‘꽃을 바친 장례’로 유명했지만, 동물이 옮겼을 수 있다는 반론이 나왔습니다. 죽은 사람을 묻고 물건을 넣었다는 것은 죽음 이후에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현실에 없는 존재를 상상해서 새기다.
독일 홀렌슈타인-슈타델 동굴에서 나온 매머드 상아 조각으로, 사람 몸에 사자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상상 속의 존재를 표현한 가장 오래된 조각 중 하나입니다. 빛이 거의 닿지 않는 동굴 깊숙한 곳에 그려진 라스코와 쇼베의 벽화를, 고고학자 루이스-윌리엄스는 샤먼이 황홀경 속에서 영적 세계와 접촉하는 의례와 연결했습니다.
죽은 아이에게 수천 시간의 노동을 바치다.
러시아 숭기르 유적에서 아이 둘이 상아 구슬 수천 개로 장식된 옷을 입고 묻혀 있었습니다. 구슬 하나를 만드는 데 한 시간 가까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 공동체가 엄청난 노동을 들였다는 뜻입니다.
농업보다 먼저 지어진 거대한 의례 장소.
튀르키예 남동부에서 높이 5미터가 넘는 T자형 돌기둥들을 원형으로 세운 유적이 발견됐습니다. 기둥에는 여우, 멧돼지, 독수리, 뱀이 새겨져 있습니다. 농업이 본격화되기 전 수렵채집인들이 지었다는 점에서, 발굴자 클라우스 슈미트는 “신전이 먼저였고 도시는 나중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발굴에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나오면서 지금은 의례 성격이 강한 정착지로 해석되지만, 공동 의례의 중심지였다는 점은 여전히 인정됩니다.
조상을 집 안에 모시다.
예리코와 차탈회위크에서는 죽은 사람의 두개골에 석회를 바르고 조개로 눈을 만들어 집 안에 보관한 흔적이 나왔습니다. 죽은 조상이 산 사람과 함께 지낸다는 조상 숭배의 이른 형태로, 이후 동아시아의 조상 제사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전통입니다.
도시와 문자가 생기면서 신들도 체계를 갖춥니다. 신전은 경제의 중심이 되고, 왕은 신의 대리인이 되고, 사제는 독립된 계급이 됩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인더스와 황하에서 각자의 신들이 등장합니다.
정화 의식의 흔적, 그러나 읽을 수 없는 문자.
모헨조다로의 대형 목욕탕은 정화 의식에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가 자세로 앉은 인물이 새겨진 인장을 후대 시바 신의 원형으로 보는 학자도 있지만 논쟁 중입니다. 문자가 해독되지 않아 이들의 종교는 거의 알 수 없습니다.
해와 계절에 맞춰 세운 돌.
영국의 스톤헨지는 하지와 동지에 해가 뜨고 지는 방향에 맞춰 돌을 세웠습니다. 수백 년에 걸쳐 고쳐 지어진 이 유적은 태양과 계절, 죽은 자를 기리는 의례가 결합한 장소로 해석됩니다.
파라오는 죽은 뒤 신이 된다.
이집트 파라오는 신의 아들이자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로, 우주와 사회의 질서인 마아트를 지키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피라미드 안 벽에 새겨진 주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문헌 중 하나로, 죽은 왕이 하늘로 올라가 신들과 함께하도록 돕는 내용입니다.
신을 먹이고 섬기기 위해 창조된 인간.
수메르 도시마다 수호신이 있었고, 도시 한가운데에는 계단식 거대 신전 지구라트가 섰습니다. 신전은 곡식을 거두고 나누는 경제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신들을 먹이고 섬기기 위해 만들어졌고, 사후 세계는 대부분 어둡고 먼지 가득한 지하였습니다.
배를 만들어 동물과 함께 살아남은 사람.
신들이 인류를 홍수로 쓸어버리려 할 때 한 사람이 배를 만들어 동물들과 살아남고, 새를 날려 보내 물이 빠졌는지 확인합니다. 성경의 노아 이야기와 매우 비슷해서, 19세기에 점토판이 해독됐을 때 큰 충격을 줬습니다. 성경이 더 오래된 근동 신화의 바탕 위에 쓰였음을 보여 줍니다.
심장을 깃털과 저울에 달다.
이집트에서는 죽은 자의 심장을 진리의 여신 마아트의 깃털과 함께 저울에 달았습니다. 죄로 무거우면 괴물에게 먹히고, 가벼우면 영원한 낙원으로 갑니다. 왕만이 아니라 개인이 생전의 행위로 심판받는다는 생각의 이른 형태입니다.
불의 제사와 하늘 아버지.
인도-아리아인이 인도 북서부로 들어오며 가져왔다는 것이 학계 다수설입니다(인도 안에서는 정치적 논쟁거리이기도 합니다). 천둥의 신 인드라, 불의 신 아그니에게 바치는 찬가로, 제사를 집전하는 브라만 계급이 큰 권력을 가졌습니다. 하늘 신 디야우스 피타(하늘 아버지)는 그리스의 제우스 파테르, 로마의 유피테르와 같은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동양의 베다 신들과 서양의 그리스 신들이 먼 조상을 공유한 것입니다.
최초의 일신교 개혁, 그리고 지워진 이름.
파라오 아케나텐은 수많은 신을 버리고 태양 원반 신 아텐 하나만 섬기도록 강요하고 새 수도까지 세웠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일신교적 개혁 시도로 꼽힙니다. 그가 죽자 개혁은 곧 폐기됐고 그의 이름은 기록에서 지워졌습니다.
거북 껍질의 균열로 조상의 뜻을 묻다.
상나라 왕들은 소뼈나 거북 껍질에 질문을 새기고 달군 막대를 대서 생긴 균열로 조상과 최고신 상제의 뜻을 점쳤습니다. 이 갑골문이 지금 한자의 직계 조상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문자가 회계에서 나왔다면, 중국의 문자는 점복에서 나온 셈입니다. 왕실 제사에는 사람을 희생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첫 기록.
이집트 파라오 메르넵타의 승전 비석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옵니다. 신앙 전통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내다 모세의 인도로 탈출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고고학의 주류 견해는 초기 이스라엘이 가나안 문화 안에서 나왔고, 엘과 바알, 여신 아세라 같은 가나안의 신들도 함께 숭배됐다고 봅니다.
중국에서는 하늘이 왕의 도덕성을 보고 통치를 맡긴다는 생각이 나오고, 페르시아에서는 선과 악의 우주적 대결이라는 그림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신 가운데 야훼 하나만 섬기기 시작합니다.
하늘은 덕 있는 자에게 통치를 맡긴다.
상나라를 무너뜨린 주나라는 하늘(天)이 덕 있는 자에게 통치를 맡기고, 덕을 잃은 왕조에게서는 그 명을 거둔다는 천명 사상으로 정변을 정당화했습니다. 신의 뜻이 왕의 도덕성과 연결된 것입니다. 이후 중국에서 왕조가 바뀔 때마다 이 논리가 쓰였고, 조상 제사와 의례(禮)는 동아시아 사회 질서의 중심이 됐습니다.
선과 악의 전쟁, 그리고 최후의 심판.
페르시아의 예언자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세계를 선한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한 영 앙그라 마이뉴의 전쟁터로 보고,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죽은 자의 심판, 세상 끝의 구세주와 부활, 최후의 심판이라는 생각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그가 산 시기는 학자마다 수백 년씩 차이가 납니다.
신의 몸에서 나온 네 신분.
『리그베다』 후기의 한 찬가는 태초의 거인 푸루샤의 입에서 사제(브라만), 팔에서 전사(크샤트리아), 넓적다리에서 평민(바이샤), 발에서 노동자(수드라)가 나왔다고 노래합니다. 신분 체계 바르나, 이후 카스트 제도의 종교적 근거가 됐습니다.
야훼의 집이 세워지다.
전승에 따르면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고 솔로몬이 첫 성전을 지었습니다. 통일 왕국의 규모는 학계에서 논쟁 중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야훼만 섬기는 단일신 숭배였다가, 점차 다른 신은 아예 없다는 엄격한 유일신교로 발전했다는 것이 다수설입니다.
서로 교류가 없던 그리스, 이스라엘, 인도, 중국에서 거의 동시에 종교의 중심이 제사와 의례에서 개인의 내면과 윤리로 옮겨 갑니다. 이스라엘은 나라와 성전을 잃고서 오히려 경전의 종교가 됩니다.
제사에서 내면으로, 신화에서 윤리로.
철학자 야스퍼스는 기원전 800~200년을 ‘축의 시대’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제물보다 정의를 요구했고, 인도의 우파니샤드와 붓다는 제사보다 깨달음을, 중국의 공자는 귀신보다 사람의 도리를 말했습니다. 철기와 화폐, 도시의 성장과 기존 질서의 붕괴가 비슷한 변화를 낳았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업, 윤회, 해탈.
베다의 끝부분인 우파니샤드는 바깥의 제사보다 내면의 지혜를 중시했습니다. 우주의 근원(브라만)과 참된 자아(아트만)가 하나임을 깨달으면, 행위의 결과(업)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개념이 이후 인도의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기본 틀이 됩니다.
교리 없는 종교, 중요한 건 올바른 제사.
그리스의 신들은 제우스를 중심으로 사람처럼 질투하고 사랑하고 싸웠습니다. 그리스 종교에는 정해진 경전도, 교리도, 독립된 성직 계급도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동물 희생 제사를 제대로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국가의 중대사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에 물었습니다.
예언자들은 패배를 신의 심판으로 읽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멸망했습니다. 아모스와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은 나라의 위기를 다른 신을 섬기고 가난한 사람을 억압한 죄에 대한 야훼의 심판으로 해석했습니다. 제물보다 정의를 요구한 그들의 목소리는 축의 시대 윤리 종교의 한 갈래입니다.
성전을 잃고 경전을 얻다.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에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됐으며 지도층이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땅과 성전과 왕을 모두 잃자 안식일, 할례, 음식 규정처럼 어디서든 지킬 수 있는 생활 율법과 기록된 경전이 정체성의 중심이 됐습니다. 토라의 많은 부분이 이 시기를 전후해 편집됐고, 엄격한 유일신교도 이때 확립됐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라.
공자는 사후 세계에 대한 질문에 답을 아꼈지만, 하늘에 대한 경외와 조상 제사, 예를 무엇보다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유교는 윤리 철학이면서 종교이기도 합니다. 중국 황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최고의 제사장이었고, 공자를 모시는 문묘 제사는 국가 의례가 됐습니다. ‘종교’와 ‘철학’이라는 서양식 구분이 잘 맞지 않는 대표적인 전통입니다.
이방인 왕이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하고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의 귀향을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이사야서는 그를 메시아(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유대인은 BC515년 성전을 다시 지었고, 페르시아 지배 아래서 천사와 악마, 부활과 최후의 심판 같은 조로아스터교의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영향의 정도는 논쟁 중입니다.
출가 수행자들의 운동에서 불교와 자이나교가 나오고, 전쟁을 뉘우친 아소카왕이 불교를 아시아로 퍼뜨립니다. 지중해에서는 비밀 의식으로 개인의 구원을 약속하는 비의 종교가 퍼지고, 유대교 안에서는 종말과 부활을 기다리는 분파들이 생깁니다.
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는다.
브라만의 제사와 신분 질서에 의문을 품고 숲으로 떠난 출가 수행자(슈라마나)들 가운데 마하비라가 자이나교를 체계화했습니다. 불살생(아힘사)을 극단까지 추구해 수행자는 벌레를 밟지 않으려 길을 쓸며 걷습니다. 땅속 생명을 해칠 수 있는 농사를 피해 신자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했고, 지금도 부유한 상인 공동체로 남아 있습니다.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신분을 묻지 않는 출가 공동체.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45년 동안 가르치며 출가 수행자 공동체인 승가를 만들었습니다. 신분을 따지지 않았고 여성의 출가도 허락했습니다. 붓다, 가르침(다르마), 공동체(승가)가 불교의 삼보입니다. 붓다가 죽은 뒤 제자들이 모여 가르침을 정리했지만(결집), 수백 년 동안은 외워서 전했습니다. 생몰 연대는 학설마다 차이가 큽니다.
입문한 사람에게만 약속된 더 나은 사후 세계.
엘레우시스 비의, 오르페우스교, 디오니소스 숭배는 입문한 사람만 참여하는 비밀 의식을 통해 개인의 구원과 더 나은 사후 세계를 약속했습니다. 국가의 공적 제사와 달리 개인의 영혼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이후 구원 종교의 선구로 봅니다.
전쟁을 뉘우친 왕이 불교를 세계로 보내다.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은 칼링가 정복 전쟁에서 10만 명이 죽은 참상을 보고 불교에 귀의했습니다. 제국 곳곳의 돌기둥과 바위에 비폭력과 관용, 생명 존중을 담은 칙령을 새기고, 각지에 사절을 보내 불교를 전했습니다. 아들 마힌다가 전한 스리랑카는 이후 상좌부 불교의 중심이 됩니다. 600년 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와 놀랍도록 비슷한 장면입니다.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의무를 다하라.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일부로, 전쟁터에서 친족과 싸워야 하는 왕자 아르주나에게 크리슈나 신이 가르침을 주는 대화입니다. 의무를 다하는 행위의 길, 지혜의 길, 그리고 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길(박티)을 제시합니다. 힌두교에서 가장 사랑받는 경전이 됩니다.
박해 속에서 부활과 종말을 기다리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리스 신에게 제사를 강요하자 마카베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승리 후 성전을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 하누카입니다. 박해 속에서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의 개입,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는 묵시 문학(다니엘서 등)이 나왔습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제2성전 시대 유대교는 여러 분파로 나뉘었습니다. 성전 제사장 귀족층인 사두개파, 율법을 일상에서 철저히 지키려 한 바리새파, 광야에서 공동체 생활을 한 에세네파, 무력 항쟁을 주장한 열심당입니다. 1947년 사해 근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문서는 이 시대 한 분파의 문헌으로, 현존 최고의 히브리어 성경 사본을 포함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모든 중생과 함께.
혼자 해탈하는 것보다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의 길을 이상으로 삼는 대승불교가 나타났습니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와 자비의 관음보살 같은 신앙이 생겨, 불교는 출가자의 수행에서 대중의 신앙으로 넓어졌습니다. 이 흐름이 실크로드를 따라 동아시아로 갑니다.
500년 동안 외우던 가르침을 글로 적다.
스리랑카의 승려들은 기근과 전쟁으로 가르침이 끊길 것을 걱정해 처음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팔리어 문자로 기록했습니다. 이 경전을 따르는 상좌부 불교는 이후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로 퍼져 남쪽 길의 불교가 됩니다.
신들과 맺은 계약, 그리고 신이 된 황제.
로마의 국가 종교는 신들과의 평화를 유지해서 국가의 번영을 보장받는 계약 같은 것이었습니다. 로마는 정복지의 신들도 받아들여 이시스, 미트라스, 키벨레가 제국 전역에 퍼졌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죽은 황제를 신으로 모시는 제사는 제국에 대한 충성의 표시가 됐고, 이를 거부한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문제가 됩니다.
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예수 운동이 민족을 넘어서는 종교가 되고, 박해를 이겨내 로마의 국교가 됩니다. 성전을 잃은 유대교는 랍비의 종교로 다시 태어나고, 불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가며, 도교는 교단을 갖춘 종교가 됩니다.
제자들은 그가 부활했다고 선포했다.
신앙 전통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그가 실존 인물이라고 봅니다. 갈릴리 출신의 유대인으로,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를 고치는 이로 알려졌으며, 로마 총독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역사학은 부활 자체를 판단할 수 없지만, 제자들이 그렇게 믿고 목숨을 걸었다는 데서 기독교가 시작됩니다.
할례 없이도, 믿음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하다 회심한 바울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며, 할례나 음식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결정 덕분에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에서 보편 종교가 됩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신약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이고, 복음서는 그보다 늦게 마가(70년경)부터 요한(100년경)까지 차례로 쓰였다는 것이 다수설입니다.
불교, 중국에 들어오다.
전승에 따르면 후한 명제가 금빛 사람의 꿈을 꾸고 사신을 보내 불교를 들여왔고, 낙양에 백마사가 세워졌습니다. 처음에는 낯선 인도 개념을 도교 용어로 번역해, 불교의 공(空)을 노장의 무(無)로 이해했습니다.
성전 없는 유대교, 랍비의 시대.
로마에 맞선 유대 전쟁 끝에 로마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135년 바르 코크바 반란 이후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세계 각지로 흩어졌습니다(디아스포라). 바리새파의 후예인 랍비들이 제사 대신 토라 연구, 회당 예배, 기도, 계명 실천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재건했고, 유대교와 기독교도 이 무렵 각자의 길을 갑니다.
신선 사상이 교단을 갖추다.
중국에는 수련으로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불사약을 만드는 연단술은 훗날 화약의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장도릉은 신자들에게 쌀 다섯 말을 받고 병을 고쳐 주는 오두미도(천사도)를 세웠습니다. 노장 사상(도가)과 구분되는, 교단을 갖춘 종교로서의 도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종교 운동이 왕조를 흔들다.
도교 계열의 태평도가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다’며 일으킨 반란이 후한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중국 역사에서 종교 결사가 반란의 중심이 되는 일이 이후에도 반복됩니다.
구전 율법을 글로 남기다.
랍비들은 구전으로 전하던 율법을 정리한 미쉬나를 편찬했고, 이에 대한 방대한 토론을 모은 탈무드(바빌로니아 탈무드는 500년경)가 뒤따랐습니다. 성전과 국가 대신 텍스트와 토론이 유대 공동체를 묶는 중심이 됩니다.
조로아스터교, 제국의 종교가 되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고 경전을 정비했습니다. 7세기 이슬람 정복 이후 쇠퇴했고, 일부 신자들은 인도로 이주해 지금의 파르시 공동체가 됐습니다. 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파르시 가정 출신입니다.
박해 속에서도 자란 교회.
64년 네로 이후 산발적인 박해가 이어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대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신분과 민족을 가리지 않는 공동체, 여성과 노예의 참여, 역병이 돌 때 도망가지 않고 환자를 돌본 일을 이유로 꼽습니다.
박해받던 종교가 공인을 받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2년 전투 전에 십자가 환상을 보고 승리했다고 전해지며, 이듬해 기독교를 공인했습니다. 정복 전쟁 뒤 불교에 귀의한 아소카처럼, 국가 권력과의 결합이 지역 종교를 세계 종교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불의 제사에서 신상 공양으로.
굽타 왕조 무렵 지금의 힌두교 모습이 갖춰졌습니다. 베다의 불 제사 대신 신전과 신상을 모시고 공양하는 의례(푸자)가 중심이 됐습니다. 보존의 신 비슈누(라마와 크리슈나는 그의 화신, 아바타라), 파괴와 재생의 신 시바, 위대한 여신 데비를 섬기는 세 흐름이 생깁니다. ‘힌두교’라는 하나의 이름은 19세기 영국 식민 시대에야 정착합니다.
교리를 회의로 정하다.
예수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인지, 하나님이 만든 최초의 피조물인지를 두고 아리우스 논쟁이 벌어지자, 콘스탄티누스가 공의회를 소집해 성부와 성자가 같은 본질이라고 정했습니다. 이후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고, 367년 아타나시우스가 지금의 신약 27권 목록을 처음 제시합니다.
박해받던 쪽이 박해하는 쪽으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습니다. 박해받던 종교가 70년 만에 제국의 종교가 되고, 이제 다른 종교를 억압하는 쪽이 됐습니다. 같은 시기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와 은총의 신학으로 서방 기독교의 기초를 놓습니다.
불교, 정확한 한문을 얻다.
서역 쿠차 출신의 승려 구마라집이 장안에 와서 『법화경』, 『금강경』 등 수많은 경전을 번역했습니다. 도교 용어를 빌린 어색한 번역을 넘어선 그의 한문 경전은 지금도 동아시아에서 읽힙니다. 불교는 수백 년의 번역을 거쳐 동아시아의 종교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을 둘러싼 첫 큰 분열.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함께 지닌다는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집트(콥트), 시리아, 아르메니아, 에티오피아 교회들이 갈라졌습니다. 그보다 앞서 갈라진 동방교회(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갑니다.
아라비아에서 이슬람이 일어나 100년 만에 스페인에서 인더스강까지 퍼집니다. 동쪽에서는 불교가 중국에서 독자적인 종파를 만들고 일본과 티베트로 건너가며, 남인도에서는 헌신의 신앙 박티가 시작됩니다. 실크로드 위에서 여러 종교가 만납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에서 시작된 수도원 운동을 베네딕도가 규칙으로 체계화했습니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수도원은 학문과 문헌 보존의 중심이 되고, 로마 교황은 서유럽의 영적, 때로는 정치적 중심이 됩니다.
외래의 신을 받아들일 것인가.
백제를 통해 불교가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처음에는 호족 가문들이 외래 신을 받아들일지를 두고 대립했지만 결국 불교가 국가 종교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후 일본 고유의 신(가미)은 사실 부처와 보살이 모습을 바꿔 나타난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신도와 불교가 1,000년 넘게 섞입니다(신불습합).
신분도 성별도 묻지 않는 사랑의 신앙.
남인도 타밀 지역의 시인 성자들은 누구나 뜨거운 사랑과 헌신으로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이 운동은 인도 전역으로 퍼지며 브라만 중심의 의례 종교를 대중의 신앙으로 바꿨습니다.
오직 하나뿐인 신에게 복종하라.
메카의 상인 무함마드는,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히라 동굴에서 명상하던 중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첫 계시를 받았습니다. 핵심은 하나뿐인 신(알라)에 대한 엄격한 유일신 신앙, 가난한 사람과 고아에 대한 정의, 최후의 심판입니다. 이슬람은 아브라함, 모세,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로 인정하고 무함마드를 그 마지막 예언자로 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새 종교가 아니라 아브라함 신앙의 회복으로 이해합니다.
메디나로의 이주, 이슬람력의 원년.
기존 신앙과 순례 경제를 위협한다며 메카 지배층이 박해하자 무함마드는 추종자들과 메디나로 이주했습니다. 메디나에서 그는 예언자이자 공동체의 정치 지도자가 됐습니다. 630년 메카에 입성해 카바의 신상들을 치우고 유일신의 성소로 바꿨고, 632년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 아라비아반도 대부분이 이슬람으로 통합됩니다.
동방교회가 실크로드 끝에 닿다.
칼케돈 이전에 갈라진 동방교회(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이 당나라 수도 장안에 들어왔습니다. 중국에서는 경교라 불렸고, 781년 세운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 그 역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같은 시기 장안에는 불교, 도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그리고 아랍 상인의 이슬람이 함께 있었습니다.
『서유기』의 삼장법사.
현장은 17년 동안 인도의 날란다 등을 다녀와 수많은 경전을 가져와 번역했습니다. 중국 불교는 이 무렵 천태종, 화엄종, 아미타불을 부르면 극락에 간다는 정토종, 그리고 경전보다 마음을 직접 꿰뚫어 깨닫는 것을 강조한 선종 같은 독자적인 종파들을 만듭니다.
번역하면 더 이상 꾸란이 아니다.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3대 칼리프 우스만 때 꾸란의 정본이 확정됐습니다. 무슬림에게 꾸란은 신의 말씀 그 자체여서, 번역본은 ‘꾸란의 의미 해설’로 여기고 예배는 아랍어로 합니다. 무함마드의 언행(하디스)이 그다음 권위이며, 신앙 고백, 하루 다섯 번의 예배, 의무 기부, 라마단 단식, 메카 순례가 다섯 기둥입니다.
수니와 시아를 가른 순교.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자, 다수파는 공동체가 선출한 칼리프를 인정했고(수니파), 소수파는 사위 알리와 그 후손만이 정당한 지도자라고 봤습니다(시아파). 알리의 아들 후사인이 카르발라에서 우마이야 왕조 군대에 일족과 함께 죽임을 당했고, 이를 애도하는 아슈라는 지금도 시아파의 가장 중요한 의례입니다. 지금 무슬림의 약 85~90%가 수니파입니다.
단번에 깨닫는다.
6대 조사 혜능은 경전 공부와 단계적 수행보다 자기 본성을 단번에 깨닫는 돈오를 강조했습니다. 선종은 이후 중국 불교의 주류가 되고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집니다.
100년 만에 스페인에서 인더스강까지.
무함마드 사후 100년이 채 안 돼 이슬람 세력은 서쪽으로 스페인, 동쪽으로 중앙아시아와 인더스강에 이르렀습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경전의 백성’으로 인정받아 인두세를 내는 조건으로 신앙을 유지했습니다(딤미). 당시 기준으로는 관용적인 제도였지만 동등한 지위는 아니었습니다.
천황은 태양 여신의 후손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720)가 천황 가문이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라는 신화를 기록했습니다. 신도는 산과 강, 나무와 바위, 조상에 깃든 신성한 존재 가미를 섬기는 일본 고유의 전통으로, 정화 의례를 중시하고 창시자나 교리가 따로 없습니다.
밀교가 티베트에 자리 잡다.
의례와 주문, 수행법을 중시하는 밀교(금강승)가 인도에서 나타나 인도의 밀교 수행자 파드마삼바바를 통해 티베트에 자리 잡았습니다. 티베트 최초의 사원 삼예가 세워졌고, 고승이 죽으면 그 환생자를 찾아 지위를 잇는 독특한 제도가 생겨납니다.
신학과 법학, 그리고 신비주의.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가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의 지식을 모으는 중심이 됐습니다. 이슬람 법(샤리아)을 해석하는 4대 수니 법학파가 생기고, 이성과 계시의 관계를 두고 신학 논쟁이 벌어졌으며, 율법보다 신과의 사랑과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주의 수피즘이 발전했습니다.
효의 나라와 출가의 종교가 부딪히다.
출가와 독신을 강조하는 불교는 효를 중시하는 유교와 충돌했고, 사원이 많은 땅과 재산을 갖게 되자 당 무종이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습니다. 수천 개의 사원이 헐리고 수십만 명의 승려가 환속당했습니다. 경교와 조로아스터교도 함께 금지돼 중국에서 사실상 사라집니다.
기독교는 동방과 서방으로 갈라지고 교황권은 정점에 이르며,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몽골이 바그다드를 무너뜨리고, 인도에서는 불교가 사라집니다. 일본에서는 누구나 구원받는 길을 내세운 새 불교 종파들이 등장합니다.
가톨릭과 정교회로.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서로를 파문하면서 서방의 가톨릭과 동방의 정교회가 공식적으로 갈라졌습니다. 교황 권위의 범위와 신경의 문구(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나오는가, 성자에게서도 나오는가)가 쟁점이었습니다.
황제가 눈 속에서 교황을 기다리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파문을 풀어 달라며 눈 속에서 맨발로 사흘을 기다렸습니다. 성직자를 누가 임명하느냐를 둘러싼 이 싸움은 교황권의 정점을 상징합니다.
200년 동안의 성전.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로 예루살렘을 되찾으려는 원정이 시작돼 20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원정 도중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가 학살당했고, 1204년 4차 십자군은 같은 기독교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해 동서 교회의 골을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비슈누의 사원이 부처의 사원으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는 힌두교 비슈누 신의 사원으로 지어졌다가 나중에 불교 사원이 됐습니다. 인도 문화가 동남아시아에 얼마나 깊이 퍼졌는지 보여 줍니다. 이후 동남아시아 대륙은 왕이 승가를 후원하고 많은 남성이 일생에 한 번 출가하는 상좌부 불교의 땅이 됩니다.
염불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는다.
일본 가마쿠라 시대에 어려운 수행 없이 대중이 구원받는 길을 제시한 새 불교 종파들이 생겼습니다. 아미타불의 이름만 부르면 된다는 호넨의 정토종, 승려의 결혼을 허용한 신란의 정토진종, 법화경을 중시한 니치렌종, 그리고 무사 계급에게 큰 영향을 준 선종(에이사이, 도겐)입니다.
고향에서 사라진 불교.
힌두교가 붓다를 비슈누의 화신 중 하나로 흡수하며 불교는 인도에서 점점 약해졌고, 투르크계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거대한 불교 대학 날란다가 파괴되면서 13세기 무렵 인도 불교는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불교는 고향이 아니라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티베트에서 살아남습니다.
청빈의 수도사, 그리고 종교재판.
청빈을 강조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같은 탁발 수도회가 생겼습니다. 같은 시기 교회는 모든 신자에게 1년에 한 번 고해를 의무화했고, 곧 이단을 심문하는 종교재판소를 만들었습니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을 종합한 신학을 세웁니다.
몽골이 칼리프 체제를 무너뜨리다.
몽골이 바그다드를 함락하며 아바스 칼리프 체제가 무너졌습니다. 같은 시기 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추종자들은 빙글빙글 도는 춤으로 신에게 다가가는 수피 교단을 만들었고, 수피 신비주의는 이후 이슬람이 퍼지는 주요 통로가 됩니다.
유대교의 신비주의.
13세기 스페인에서 신비주의 문헌 『조하르』가 나오며 카발라가 발전했습니다. 앞서 마이모니데스가 유대교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종합했다면, 카발라는 신의 내적 구조와 인간의 역할을 상징으로 탐구했습니다. 유대인은 영국(1290)과 스페인(1492)에서 추방당하고, 흑사병 때는 우물에 독을 탔다는 누명을 쓰는 등 반복된 박해를 겪습니다.
정복이 아니라 무역으로.
동남아시아에는 이슬람이 정복이 아니라 인도양을 오가던 무역 상인과 수피 선교사들을 통해 퍼졌습니다. 수마트라와 자바의 항구 도시들이 차례로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그 결과 지금 무슬림이 가장 많은 나라는 중동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입니다.
교황이 둘, 셋.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에 머문 뒤(1309~1377), 교황이 둘, 한때는 셋까지 서는 혼란이 4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교회의 권위가 떨어지자 영국의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의 후스가 개혁을 외쳤고, 후스는 1415년 화형당했습니다.
힌두도 무슬림도 형식을 버려라.
이슬람 왕조가 인도 북부를 지배하는 동안 갈등과 함께 교류도 있었습니다. 수피 성자들과 힌두 박티 시인들은 형식을 넘어선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시인 카비르는 양쪽의 형식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하나의 신을 노래했습니다.
정교회의 중심이 이슬람 제국의 수도로.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성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바꿨습니다. 오스만, 이란의 사파비, 인도의 무굴이 이슬람 세계의 3대 제국이 되고, 정교회의 중심은 점차 러시아로 옮겨 갑니다.
힌두도 없고 무슬림도 없다.
펀자브의 구루 나나크는 깨달음을 얻은 뒤 형상 없는 하나의 신, 신분 차별 거부, 출가가 아닌 일상 속 정직한 노동과 나눔을 가르쳤습니다. 모든 신분이 함께 앉아 먹는 공동 식당(랑가르) 전통이 지금도 이어집니다. 힌두교와 이슬람의 만남에서 태어난 시크교의 시작입니다.
인쇄술을 탄 루터의 종교개혁이 서방 교회를 쪼개고, 유럽은 100년 넘게 종교 전쟁을 치릅니다. 가톨릭은 예수회를 앞세워 아시아로 향하고, 그곳에서 조상 제사를 둘러싼 충돌이 벌어집니다. 이란은 시아파 국가가 되고, 인도에서는 무굴 황제가 종교 간 토론을 엽니다.
이란이 시아파 국가가 되다.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삼았습니다. 수니파 오스만 제국과 경쟁하며 이란을 시아파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이것이 지금 이란이 시아파 국가인 기원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경.
독일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돈을 내면 죄의 벌을 면해 준다는 면벌부 판매를 비판했습니다. 구원은 선행이나 교회의 성사가 아니라 믿음과 은총으로 받으며, 신앙의 권위는 교황이 아니라 성경에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 직접 선다는 만인사제설을 내세우고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인쇄술이었습니다. 앞선 개혁가들은 쉽게 진압됐지만, 루터의 글은 몇 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습니다.
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다.
헨리 8세가 이혼 문제로 교황과 갈라서며 잉글랜드 국교회를 세웠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가, 제네바에서는 칼뱅(1536)이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이 미리 정했다는 예정론으로 개혁을 이끌었고, 유아 세례를 거부한 재세례파도 생겼습니다. 개신교는 처음부터 여러 갈래였습니다.
가톨릭의 반격과 해외 선교.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가 세운 예수회는 교육과 해외 선교의 선봉이 됐습니다. 트렌트 공의회(1545~1563)는 가톨릭 교리를 재정비하고 개신교에 맞섰습니다. 유럽의 식민지 확장과 함께 기독교는 아메리카와 아시아, 아프리카로 퍼졌고, 선교는 학교와 병원을 세우기도 했지만 식민 지배와 얽혀 있었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수십만의 신자, 그리고 숨은 기리시탄.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기독교를 전해 한때 수십만 명이 신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막부는 1614년 기독교를 금지했고,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철저히 탄압했습니다. 일부 신자는 불교도로 위장한 채 200년 넘게 몰래 신앙을 지켰습니다.
무굴 황제의 관용.
무굴 황제 아크바르는 힌두교, 이슬람교, 자이나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학자들을 모아 토론하게 하고, 비무슬림에게 매기던 인두세를 폐지했습니다. 이슬람 왕조가 다수의 힌두교도를 다스리는 인도에서 보기 드문 관용 정책이었습니다.
바다처럼 넓은 지혜를 가진 스승.
몽골의 알탄 칸이 티베트의 한 고승에게 달라이 라마 칭호를 줬습니다. 이후 달라이 라마는 환생으로 이어지며 티베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가 됩니다.
유학자의 옷을 입은 선교사.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는 중국어를 배우고 유학자의 옷을 입은 채 서양 과학과 수학을 소개하며 지식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조상 제사와 공자 제사를 종교가 아닌 사회적 예절로 보고 허용했습니다. 이것이 100년 뒤 전례 논쟁의 씨앗이 됩니다.
신교와 구교, 유럽을 불태우다.
프랑스 종교전쟁에 이어 신교와 구교의 대립이 유럽 전체를 휩쓴 30년 전쟁으로 번져 수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각 나라가 자기 종교를 정하는 원칙이 확립되며 유럽의 종교 전쟁 시대가 끝납니다.
과학과 교회 권위의 충돌.
지동설을 지지한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가택 연금됐습니다. 이 재판은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과학과 종교의 충돌을 상징하는 사건이 됩니다. 교황청은 1992년 판결이 잘못이었다고 공식 인정했습니다.
경전이 영원한 스승이 되다.
시크교의 열 번째 구루 고빈드 싱이 신앙 공동체 칼사를 세우고, 자신 이후에는 사람 대신 경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를 영원한 구루로 삼게 했습니다.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터번을 쓰는 시크교도의 모습도 이때 정해졌습니다.
계몽주의는 성경을 다른 고대 문헌처럼 분석하고, 신은 세상을 만들었지만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을 퍼뜨립니다. 반대로 개인의 회심과 뜨거운 체험을 강조하는 부흥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슬람과 유대교, 힌두교에서도 개혁 운동이 시작됩니다.
조상 제사는 우상숭배인가.
마테오 리치의 방식에 다른 수도회들이 반대하면서 벌어진 논쟁 끝에 교황청이 조상 제사를 금지했고, 청나라 강희제는 이에 맞서 기독교 선교를 금지했습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핵심인 종교와 무엇을 실천하느냐가 핵심인 전통이 정면으로 부딪힌 사건입니다.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영국의 존 웨슬리가 회심 체험 뒤 감리교 운동을 이끌었고, 미국에서는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개인의 회심과 뜨거운 신앙 체험을 강조하는 복음주의는 이후 미국 개신교의 주류가 됩니다.
율법 공부보다 기쁨과 체험.
동유럽의 바알 셈 토브가 율법 학습보다 기쁨과 신비적 체험, 진심 어린 기도를 강조한 하시디즘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계몽운동(하스칼라)을 거쳐 유대교는 근대 사회에 적응하려는 개혁파, 전통을 지키는 정통파, 그 중간의 보수파로 나뉩니다.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
아라비아의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는 성자 숭배 같은 관습을 배격하고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엄격한 개혁 운동을 일으켜 사우드 가문과 손잡았습니다. 이 동맹이 지금 사우디아라비아의 기원입니다.
힌두교 안에서 시작된 개혁.
람 모한 로이는 과부가 남편의 화장 장작더미에서 함께 죽는 관습(사티)을 폐지하자는 운동을 이끌었고, 영국 식민 정부가 이를 금지했습니다. 힌두교를 근대적 이성과 조화시키려는 개혁 운동의 시작입니다.
모든 종교는 하나의 신에게서 나왔다.
페르시아에서 바브가 새 계시를 선포했고, 그 뒤를 이은 바하올라가 모든 종교는 하나의 신에게서 나온 단계적 계시이며 인류는 하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란에서 박해받으며 세계로 퍼진 바하이 신앙은 근대 이후 생겨난 종교 가운데 가장 넓게 퍼진 종교 중 하나입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모르몬교(1830)가 생겨납니다.
다윈의 진화론과 성서 비평, 마르크스와 니체, 프로이트가 종교의 권위를 흔들고, 학자들은 종교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동시에 종교는 민족주의와 결합하고, 동양 종교가 서양에 소개되며, 오순절 운동과 근본주의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20세기 최악의 종교 박해, 홀로코스트가 벌어집니다.
예수의 동생이라 믿은 사람.
기독교 소책자를 읽고 자신이 예수의 동생이라고 믿게 된 홍수전이 일으킨 반란은 2,000만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내전 중 하나가 됐습니다. 서양 종교가 동양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변한 사례입니다.
창조 이야기와 과학의 충돌.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이 신의 설계 없이도 생겨날 수 있다고 설명해 성경의 창조 이야기와 정면으로 부딪혔습니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성경을 다른 고대 문헌처럼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역사비평적 성서 연구가 본격화됩니다.
천황을 신으로 섬기다.
메이지 정부는 1,000년 동안 섞여 있던 신도와 불교를 강제로 분리하고,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국가 신도를 만들어 군국주의와 결합시켰습니다. 1945년 패전 후 국가와 신도의 분리가 명령됐고, 1946년 천황은 자신이 신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같은 시기 일본은 영어 religion을 ‘종교(宗敎)’로 번역했습니다. 그전의 동양 전통에는 믿음, 철학, 의례, 생활 규범을 따로 나누는 말이 없었습니다.
종교의 기원을 과학으로 설명하다.
인류학자 타일러는 꿈에서 죽은 사람을 보는 경험에서 사람과 동물, 자연물에 영혼이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봤습니다. 프레이저는 『황금가지』(1890)에서 인류가 주술에서 종교로, 다시 과학으로 발전한다는 도식을 내놨습니다. 지금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서양 중심적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종교를 비교하고 설명하는 학문인 종교학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종교에 대한 근대의 비판.
니체는 근대 유럽이 더 이상 기독교를 가치의 토대로 삼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앞서 포이어바흐는 신이 인간의 이상을 바깥에 투사한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종교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아편’이라고 했고, 뒤이어 프로이트는 종교를 어린 시절 보호자에 대한 갈망이 만든 환상이라고 봤습니다.
동양 종교, 서양 무대에 서다.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의회에서 힌두 수도승 비베카난다의 연설이 큰 반향을 일으키며 힌두교와 요가가 서양에 본격적으로 소개됐습니다. 이후 일본의 스즈키 다이세쓰가 선불교를 서양에 알립니다. 종교 간 대화의 출발점으로 꼽힙니다.
유대 국가를 세우자.
반유대주의가 심해지자 헤르츨이 『유대 국가』를 펴내며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자는 시온주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종교 공동체였던 유대인을 민족으로 보는 정치 운동입니다.
구원의 불안이 자본주의를 낳았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칼뱅주의자들이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불안해하며 근면하고 검소하게 일해 얻는 성공을 구원의 표시로 여긴 것이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낳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근대화를 세계에서 신비와 마법이 사라지는 ‘탈주술화’로 봤습니다.
방언과 치유, 오순절 운동.
로스앤젤레스의 작은 교회에서 성령의 은사(방언, 치유)를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흑인 목회자가 이끌고 인종이 섞인 집회였다는 점도 특별했습니다. 지금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기독교 흐름입니다.
종교는 사회가 스스로를 숭배하는 것.
사회학자 뒤르켐은 호주 원주민의 토템 연구를 바탕으로, 종교는 세상을 성(聖)과 속(俗)으로 나누고 사회가 스스로를 성스러운 것으로 숭배하며 공동체를 묶는 장치라고 봤습니다. 종교를 신이 아니라 사회의 기능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1,300년 만에 사라진 칼리프.
튀르키예 공화국의 아타튀르크가 오스만 제국의 칼리프 제도를 폐지하고 세속 국가를 세웠습니다. 4년 뒤 이집트에서는 이슬람을 사회와 정치의 원리로 삼자는 무슬림 형제단이 생겨, 세속화와 이슬람 정치 운동의 긴장이 시작됩니다.
근본주의와 진화론.
미국 테네시주에서 진화론을 가르친 교사가 재판을 받았습니다. 성경의 문자적 무오성을 강조하며 진화론과 성서 비평에 맞선 근본주의의 상징적 사건입니다.
종교에서 나온 비폭력 저항.
간디는 힌두교와 자이나교, 기독교 산상수훈,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은 비폭력 저항(사티아그라하)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영국의 소금 전매에 맞선 소금 행진은 그 상징입니다.
600만 명의 유대인.
나치 독일은 유럽의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학살해 약 6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중세부터 이어진 기독교 사회의 반유대주의와 근대의 인종주의가 결합한 결과였고, 전후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학자들은 근대화가 진행되면 종교가 사라질 거라고 예측했습니다. 서유럽에서는 그 예측이 맞았지만, 세계 전체로 보면 빗나갔습니다. 종교는 독립과 혁명, 정체성 정치의 중심에 다시 섭니다.
종교를 기준으로 나뉜 나라.
2,000년 만의 유대 국가.
홀로코스트 이후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 건국됐습니다. 같은 땅에 살던 수십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고향을 떠났고, 이후 이어지는 분쟁은 종교와 민족, 땅이 얽힌 현대의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됩니다.
카스트에 맞선 불교.
불가촉천민 출신 정치가로 인도 헌법을 기초한 암베드카르가 수십만 명의 불가촉천민과 함께 불교로 개종했습니다. 카스트에 맞서는 신불교 운동으로, 고향에서 사라졌던 불교가 인도로 돌아온 장면입니다.
망명이 세계화를 낳다.
중국의 티베트 지배에 맞선 봉기가 실패한 뒤 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했습니다. 이후 티베트 불교는 오히려 전 세계로 퍼졌고, 달라이 라마는 1989년 노벨 평화상을 받습니다.
가톨릭, 세상을 향해 창을 열다.
라틴어 대신 각 나라 말로 미사를 드리게 하고,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했으며, 유대인에게 예수의 죽음에 대한 집단 책임을 묻는 오랜 관념을 공식적으로 거부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가난한 사람의 해방을 강조하는 해방신학이 나옵니다.
사원과 교회가 무너지다.
1949년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뒤 종교는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됐고, 문화대혁명 동안 사원과 교회가 파괴되고 종교 활동이 거의 금지됐습니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국가가 공인한 단체를 통한 종교 활동이 다시 허용되면서 불교, 도교, 기독교 신자가 크게 늘어납니다.
명상과 요가, 서양의 유행이 되다.
1960년대 반문화 운동과 함께 동양의 명상과 요가가 서양에서 유행했고, 비틀즈가 인도 리시케시로 명상 수행을 떠난 것이 상징적인 장면이 됐습니다. 반대로 기독교는 같은 시기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빠르게 성장합니다.
성직자가 통치하는 국가.
이란 혁명으로 호메이니가 이끄는 성직자 통치의 이슬람 공화국이 세워졌습니다. 같은 해 미국에서는 복음주의 단체 ‘도덕적 다수’가 생겨 종교가 정치의 중심으로 돌아왔습니다. 세속화 이론이 흔들리기 시작한 해입니다.
불교 수행이 심리 기법이 되다.
존 카밧진이 불교의 명상법에서 종교색을 빼고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으로 만들었습니다. 마음챙김(마인드풀니스)은 지금 병원, 학교, 기업에서 널리 쓰입니다. 종교 수행이 세속적 기법으로 변신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힌두 민족주의의 부상.
힌두 신 라마의 탄생지로 여겨지는 아요디아의 16세기 이슬람 사원이 힌두 민족주의자들에게 파괴됐습니다. 힌두 정체성을 국가의 중심에 두려는 힌두 민족주의가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하며, 세속 국가 인도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됩니다.
세계는 여전히 격렬하게 종교적이다.
세속화 이론의 대표 학자였던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자기 이론을 철회하고, 세계는 여전히 종교적이며 서유럽이 오히려 예외라고 인정했습니다. 이슬람 부흥, 남반구 기독교의 성장, 미국 복음주의, 힌두 민족주의가 그 근거였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남반구로 옮겨 가고, 이슬람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며, 종교가 없는 사람은 세계 세 번째 규모의 집단이 됩니다.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믿는 방식과 장소가 바뀌고 있습니다.
극단주의와 종교에 대한 새 질문.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조직 알카에다가 미국에서 동시다발 테러를 일으켰습니다. 이런 조직들은 전 세계 무슬림 중 극소수이며 희생자의 상당수도 무슬림이었지만, 이후 종교와 폭력, 이슬람과 서양의 관계가 세계 정치의 중심 주제가 됩니다.
큰 신이 큰 사회를 만들었나.
작은 수렵채집 사회의 신들은 인간의 도덕에 별 관심이 없는데,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협력해야 하는 큰 사회가 되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심판하는 신이 등장했다는 가설입니다. 인지종교학은 보이지 않는 행위자를 과잉 탐지하도록 진화한 뇌가 신앙의 바탕이라고 봅니다. 큰 신이 먼저인지 큰 사회가 먼저인지는 데이터 분석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이 남쪽으로.
아르헨티나의 프란치스코가 첫 남미 출신 교황이 됐습니다. 1900년에는 기독교인 대다수가 유럽과 북미에 살았지만, 지금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에 더 많이 삽니다.
7세기의 꾸란 조각.
영국 버밍엄 대학이 소장한 꾸란 사본 조각이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으로 7세기 초중반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꾸란 사본 중 하나입니다.
종교는 사회주의와 중국 문화에 맞춰라.
중국은 불교, 도교, 이슬람교, 천주교, 개신교의 5대 종교를 공인하고, 종교가 사회주의 체제와 중국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종교의 중국화’ 정책을 공식화했습니다. 국가가 종교를 관리하는 중국의 오랜 전통이 이어집니다.
파괴된 모스크 자리에 선 신전.
1992년 이슬람 사원이 파괴된 자리에 힌두 신 라마의 신전이 봉헌됐습니다. 힌두 민족주의의 상징적 승리이자, 세속 국가 인도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건입니다.
기독교 28.8%, 이슬람 25.6%, 무종교 24.2%.
퓨 리서치 센터의 분석(2020년 기준)에 따르면 기독교는 약 23억 명으로 여전히 가장 크지만 비중은 줄었고, 이슬람은 약 20억 명으로 가장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은 세 번째 규모이며, 주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종교를 떠나며 늘었습니다. 불교는 주요 종교 중 유일하게 신자 수가 줄었습니다.
최초의 미국인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한 뒤, 5월 8일 미국 출신으로 페루에서 오래 사목한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제267대 교황 레오 14세로 선출됐습니다.
환생은 누가 정하는가.
90세 생일을 앞둔 14대 달라이 라마가 달라이 라마 제도가 이어질 것이며, 자신의 환생자를 찾고 인정할 권한은 자신이 세운 가덴 포드랑 재단에만 있다고 밝혔습니다. 후계자 선정에 관여하겠다는 중국 정부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선언입니다.